[형이상학] 비존재의 역설: 크립키, 콰인, 마이농의 견해

본 [형이상학] 항목은 교수님께 동의를 얻고 2021년 1학기 서울대학교 ‘형이상학’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내용 흐름은 수업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핸드아웃을 최대한 풀어 쓰려 노력했다. 본 글에는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며, 그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사전 문의 없이 무단으로 복제, 배포하는 행위는 금한다.


현재의 분석적 전통에서 보면 러셀의 견해가 지배적이지는 않다
; 그러나 현대 철학의 표준적 견해들은 어떤 의미에서 러셀적이다
; 있음과 존재함을 구분하지 않고, 존재론에 있어 일상언어의 언어분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러셀의 통찰을 공유한다(러셀적 견해)

러셀의 견해는 아니지만 러셀적인 견해에 대해 살펴보자:

비표준적 견해
; 마이농


지시적 표현의 의미에 관한 크립키의 견해(Naming and Necessity)
; 러셀은 진정한 이름은 어떤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함으로써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다(이름에 대한 밀주의 이론)
; 크립키는 이에 동의한다
; 러셀은 일상 언어의 이름은 진정한 의미의 이름이 아니고, 위장된 한정기술구라 말한다
; 그러나 크립키는 일상 이름도 대상을 직접 지시함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한정기술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러셀의 주장 ‘일상 이름은 위장된 한정기술구다’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1) 일상 이름은 그것과 결부된 한정기술구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일상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그 한정기술구가 의미하는 바와 같다) – 이름의 의미에 대한 주장
(2) 일상 이름이 어떤 대상을 지시하는 방식은 직접적인 지시가 아니라, 그것과 결부된 한정기술구의 조건을 유일하게 만족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 대상을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것이다 – 이름의 지시체를 결정하는 방식에 대한 주장(보다 약한 주장)

크립키) 러셀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하든간에 둘 다 틀렸다!

러셀의 주장 (1)에 대한 크립키의 비판
; ‘문재인은 제19대 한국 대통령이 아니었을 수 있었다’
; 문재인의 이름에 결부되어 있는 한정기술구로 대치해 보자
; ‘제19대 한국 대통령이 제19대 한국 대통령이 아니었을 수 있었다’
; 문재인이라는 일상 이름과 그것에 결부된 한정기술구가 동의어라면, 대치된 문장은 원래 문장과 진리치가 같아야 한다(의미상의 차이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전자는 참이고 후자는 거짓이다
; 또한 ‘문재인은 한국의 제19대 대통령이다’를 ‘제19대 한국 대통령은 한국의 제19대 대통령이다’로 바꾸면 전자는 경험적 참, 후자는 선험적 참인 문장이 된다

; 일상 이름은 그것과 결부된 한정기술구와 동의어로 볼 수 없다
; 일상 이름을 통해 대상을 지시하는 방식과 한정기술구를 통해 대상을 지시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다
; 일상 이름을 통해 대상을 지시할 때에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하고 그리고 그 대상이 현실적으로 어떠한지, 다른 반사실적 상황에서는 어떠했을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 한정기술구를 통해 대상을 지시할 때에는, 한정기술구는 조건적으로 대상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다른 가능한 상황에서 제19대 한국 대통령은 ~했을 거야’라고 말할 때 다른 가능 세계를 먼저 상정한 다음 그 세계에서 제19대 한국 대통령의 조건을 만족하는 대상이 누군지 찾게 된다(대상이 고정되지 않는다)

러셀의 주장 (2)에 대한 크립키의 비판
; 어떤 이름을 사용하여 그 이름의 지시체를 지시할 때 그 이름과 결부된 한정기술구가 그 지시체와 유일하게 결부될 만큼 충분한 정보를 담고 있지 않음에도 우리는 적절히 이름을 사용한다
; 이름을 사용할 때 우리가 결부시키고 있는 한정기술구를 만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은 없다(한정기술구의 정보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그 대상을 지시하며 언어행위를 한다
; 또한 우리는 이름을 사용할 때 잘못 결부되어 있는 한정기술구를 결부시키기도 한다
; 따라서 우리가 일상 이름을 사용해 이름의 지시체를 결정하는 것은, 그 이름의 사용자가 그 이름에 결부시키고 있는 한정기술구의 내용을 만족하는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름의 사용이 지시사와 같이 대상을 직접 지시하지는 않지만(그런 의미의 직접성은 아니지만), 한정기술구를 만족하는 방식으로 지시체가 결정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 이름의 지시체 결정은 이름 사용의 인과적 연쇄 고리를 통해 이루어진다(처음에 이름을 사용하고자 했던 사람이 지시한 그 대상을 지시하게 된다)
;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 것과 관련없이 객관적인 이름 사용의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 모든 사람이 이름을 사용할 때마다 그 대상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한정기술구를 알고 있지 못함에도 성공적으로 이름을 사용하여 그 지시체를 지시할 수 있다
; 일상이름과 관련해서는 크립키의 직접 지시 이론이 지배적이다

‘존재함’에 대한 크립키의 견해(Reference and Existence)
; ‘소크라테스가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 ‘존재한다’는 속성이나 명제함수에 대한 속성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통해 지시하는 바로 그 대상에 대한 속성이다
; 따라서 ‘이것은 존재한다’는 무의미하지 않다, 유의미할 뿐 아니라 참이다
; ‘이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가 참이라면 ‘이것이 존재한다’가 무의미할 수는 없다(러셀 견해에 대한 무어의 비판)
; 크립키에게는 ‘비존재의 역설’이 다시 대두된다

러셀은 굳이 왜 존재를 개체에 적용되는 속성이 아니라 2차 속성으로 상정했는가?
; ‘존재한다’가 개체에 적용되는 속성이라면, 어떤 개체에 그 술어를 적용했을 때 그 진술이 거짓일 가능성은 없다(있는 대상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 모든 것에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술어 ‘존재한다’는 진정한 술어로 볼 수 없다
; 따라서 술어 ‘존재한다’가 유의미하게 정의되기 위해서는 그 술어를 적용했을 때 진술이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개체에 적용되면 안 된다

이러한 러셀의 주장에 대한 고민
; ‘존재한다’를 적용한 진술이 거짓일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이 왜 ‘존재한다’가 개체에 적용되는 속성이 아닐 이유가 되는가?
; ‘자기동일적이다’라는 술어 역시 개체에 적용하여 거짓일 가능성이 없는 술어이지만, 술어이다
; 그러나 ‘존재한다’와 ‘자기동일적이다’, 두 술어를 적용한 진술에서 거짓일 가능성이 없는 방식은 조금 다른 것 같다

크립키의 주장처럼 ‘존재한다’가 개체에 적용되는 술어라면, ‘a가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 ‘어떤 것이 a이다’, 즉, ‘(∃x)(x=a)’를 의미한다
; 하나마나 한 이야기가 될 수는 있지만(사소한 속성, 항상 참) 이는 무의미함과는 또 다르다
; 따라서 크립키도 1차 술어 논리에서 ‘존재한다’라는 술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받아들인다(불필요한 술어)

크립키의 주장에서는 다시 비존재의 역설이 제기된다
; ‘홈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참인 문장이라는 직관이 있지만, ‘홈즈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거짓인 문장이 되는 것 같다
; 크립키는 ‘홈즈’도 지시체를 가진다고 말한다, 추상적인 존재자로서 실제로 존재한다
; ‘UN기구’가 그 건물이나 인물들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 크립키의 주장 하에서는 비존재의 역설이 역설로서 다가온다, 실제로 ‘홈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짓이다, 셜록홈즈는 추상적 인공물로서 존재한다


콰인은 지시적 표현의 의미에 대한 러셀의 견해, ‘존재함’에 대한 러셀의 견해를 모두 받아들이며 러셀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논의를 전개한다
; 콰인은 존재론적 탐구를 수행하는 데 있어 어떤 방법론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세웠다
; 방법론을 중심으로 콰인의 견해를 살펴보자

러셀
; 일상 언어로부터 바로 존재론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에 문제가 있다
; 지시적 표현은 그것이 의미하는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These roses are red(가)’와 ‘There are red roses(나)’가 참이라면, (가)와 (나)로부터 ‘There is something they have in common(다)’를 추론할 수 있는가?
; (가)와 (나)가 참이기 때문에 (가)와 (나)에서 ‘빨갛다(red)’라는 용어는 유의미하게 사용되었다, 즉 의미를 가진다
; 이때 이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개체와는 구별되는 범주의 존재자인 ‘속성’과 같은 것이다
; ‘빨갛다’라는 용어가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속성; (가), (나)로부터 (다)를 추론
; 이 문제에 대해 러셀은 (가), (나)로부터 (다)를 추론할 수 있으며 술어의 의미로서 보편자가 있다고, (다)에서 ‘something’이 보편자라고 말한다

콰인
; 술어가 유의미하게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술어의 의미로서의 속성이 있다는 생각은 잘못됐다
; ‘빨갛다’가 유의미하게 사용된 것은 맞지만 그로부터 그 용어가 어떤 의미하는 바가 있고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그것이 유의미해진다는 것을 바로 이끌어낼 수는 없다
; 용어가 유의미하게 사용된다는 사실은 그 용어가 표현하는 어떤 존재자를 상정하지 않은 채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행동주의적 방식)
; 이는 지시적 표현에 대한 러셀의 통찰을 술어에도 똑같이 적용시킨 것이다

그러나 한편 용어의 유의미성이 아닌 다른 이유를 바탕으로 하여 속성이 있을 수는 있다
; 콰인은 속성실재론을 거부하지만(속성유명론) 그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입장은 아니라고 말한다
; 다만 콰인은 속성유명론의 입장이 우리가 수용하기에 더 합리적인 입장이라고 말한다

콰인에 따르면 참인 진술들(진술들의 묶음 = 이론)이 있을 때 그로부터 존재론과 관련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 참인 진술에 사용된 술어를 봄으로써 ‘어떤 것이 존재하는구나’라는 결론을 내어서는 안 된다
; 지시적 표현, 단칭 표현, 술어를 통해서는 존재론적 함의를 이끌어낼 수 없다
; ‘To be is to be the value of a (bound) variable’, 존재한다는 것은 속박 변항의 값이 된다는 것이다
; 이론 속 진술들의 논리적 형식이 드러나도록 참인 진술들을 모두 분석한다(1차 술어 논리로 표현)
; 존재양화문장으로 표현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 존재양화사 안에 속박되어 있는 속박변항의 값이 되는 것을 보자
; 속박변항의 값이 되는 것들에 대해 그것이 존재한다
; 우리가 이 이론이 참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이론의 진술들이 속박변항의 값으로 삼고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존재론적 개입(ontological commitment)은, 지시적 표현이나 술어를 들여다봄으로써가 아니라, 존재양화사의 변항의 값(존재양화사의 변항에 대입하였을 때 참이 되는 값)에 해당하는 것을 고려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속성실재론과 속성유명론이 경합하고 있을 때 결정의 기준은 무엇인가?
; 여러 진술들이 있을 때 어떤 입장은 어떤 진술들이, 다른 어떤 입장은 다른 어떤 진술들이 참이라 할 것이다, 즉 경합하는 이론이 있다
; 콰인이 제시한 존재론적 개입의 기준은 하나의 이론이 주어져 있을 때 그 이론이 존재한다고 함의하는 바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찾기 위해서는 경합하는 이론들 중 어떤 이론이 최선의 이론인지 결정한 후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ex. 스위스 치즈에 구멍이 하나 나 있다, 이때 구멍이 존재하는 것인가?
; 일상적으로 ‘이 스위스 치즈에 구멍이 있다’라고 말한다, 즉 (∃x)(x는 구멍이고, … ). 따라서 구멍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 같다
; 이 일상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 치즈는 어떤 위치에서 뚫려있다’라고 받아들인다면 이 진술은 구멍에 대한 양화진술이 아니다
; 전자와 같이 이해한다면 일상진술은 액면 그대로 참이다(구멍에 대한 존재양화를 받아들이고, 구멍은 존재한다, 구멍실재론)
; 후자와 같이 이해한다면 사실 뚫려있다는 술어를 쓴 것 뿐이고 구멍에 대한 존재양화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구멍유명론)

콰인은 이 가운데 어떤 이론이 옳은지 판단할 일의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은 없다고 말한다
; 구멍실재론과 구멍유명론에는 각각 그 밑바탕에 깔린 생각들이 있을 것이다
; 그러한 생각들과 다른 이론들과의 정합성 등을 통합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이론적 덕목에서 어떤 이론이 더 나은지 판단해야 한다
; 이론의 평가는 전체론적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학적인 탐구인가?
; 보다 학문적인 탐구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론이 참인지 아닌지에 대한 보다 일의적이고 객관적인 결정방법이 있어야 한다
; 형이상학 이외에 다른 학문에서의 이론 간 경합에서는 보다 일의적이고 객관적인 결정방법이 있을 것이다
; 가령, 자연과학의 경우에는 형이상학처럼 결정하지 않을지 모른다
; 이론 T가 성립하면 S가 성립함을 확인하고, T가 예측하는 바인 S가 실제로 성립하는 것인지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확인하여 이론 T의 참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 이처럼 자연과학은 형이상학과는 질적으로 다른 탐구를 할 수 있다
; 자연과학은 일의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통해 이론의 참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자연과학에서의 이론 평가의 절차를 이처럼 이해하는 것이 실제 과학사에서의 과학 활동의 이론 평가 절차와 일치하는가?
; 토마스 쿤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 천왕성의 궤도는 뉴턴 역학의 예측과 같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실제 과학사에서는 뉴턴 역학이 틀렸다고 하지 않았다
; 대신 아직 관측하지 않았지만 천왕성 주변에 천왕성의 궤도에 영향을 주는 행성이 있을 것이라 추정하고, 뉴턴 역학을 기반으로 계산하여 해왕성을 발견한다

이와 같이 이론 평가의 절차를 이렇게 이해하는 데에 가지는 구조적 결함이 있지는 않은가?
; 이론이 예측하는 바를 이끌어낼 때 이론뿐 아니라 보조가설이 존재하여 이론과 보조가설이 함께 S를 함축한다
; S가 실제로 성립하지 않았을 때 이론 T이 틀린 것이 아니라 보조가설이 틀린 것이라 말할 수 있다
; 이론 T가 틀렸다는 이론과, 보조가설이 틀렸다는 이론간의 경합이 다시 나타난다
; 결국 두 이론 사이에서 이론적 덕목에 대한 판단을 통해 결정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학문에 있어서도 기본적인 이론 평가의 방법에는 이론적 덕목을 통한 전체론적 평가를 채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형이상학의 방법론도 일반 학문의 방법론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비과학적이거나 비학문적인 것이 아니다

콰인은 있음과 존재함은 같다는 러셀의 견해와 유의미한 진술에 나타나는 지시적 표현들 가운데 진정한 이름만이 있는 것을 지시함으로써 의미를 가진다는 러셀의 견해를 모두 받아들이지만, 존재는 개체의 속성이 아니라 속성의 속성이라는 러셀의 견해는 엄밀히 말해 반대한다
; 콰인은 속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러셀3을 유명론적 버전으로 바꿔서 ‘존재라는 술어는 개체에 적용되는 술어가 아니라 다른 술어에 적용되는 술어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 콰인은 러셀과 같은 방식으로 비존재의 역설에 대응할 수 있지만, 일상 이름이 한정기술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크립키의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


마이농의 비표준적 견해
; 러셀은 초기에 P3를 거부함으로써, 후기에 P1을 거부함으로써 비존재의 역설을 피했다
; P2를 거부함으로써 역시 역설이 피해질 수 있을까? > 마이농의 견해

우리의 생각은 어떤 대상을 향해서 나타나는 것 같다 (정신적인 것이 가지는 본질적 특성)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들
(a) 우리들과 같이 시공간을 점유하는 대상들
(b) 수, 함수, 명제, 속성과 같은 수학적/철학적 대상들
(c) 둥근 사각형, 유니콘, 홍길동과 같은 대상들
; a는 존재하는 것들이다
; b는 존재하는(exist) 것은 아니며, 존립하는(subsist) 것이다
; 어떤 의미에서 러셀처럼 ‘있음’과 ‘존재함’을 구분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마이농의 논의의 초점은 a와 b의 구분(있음과 존재함의 구분)이 아니라 c에 있다
; a와 b가 있는 것들이라면, c는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있지도 않은 것들이다
; a는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b는 추상적으로 존재한다(존립)
; 어떤 종류의 대상에 있어서는 있음과 무관한 방식으로 그 대상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있지도 않은 대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 우리의 판단은 ‘어떤 대상이 있다/존재한다’라는 판단과 ‘어떤 대상이 ~하다’라는 판단이라는 두 방식으로 작동한다
; 표준 견해의 문제는 그 두 판단이 구분되고,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 있다
; 어떤 대상에 대해 그 대상이 ~하다라는 판단은, 그 대상이 있다는 판단과 독립적으로 성립할 수 있다 (독립성 원리)
; Sosein(~하다)은 Sein(있다)과 독립적으로 성립한다

따라서 마이농은 P2를 거부함으로써 비존재의 역설을 피할 수 있다

독립성 원리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냐 그렇지 않냐에 따라 마이농의 견해는 받아들여지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어떤 대상에 대해 있다라고 하는 것을 상정하지 않고서도 어떤 속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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