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부분 변화의 퍼즐에 대한 내속이론의 대응: 공점주의

본 [형이상학] 항목은 교수님께 동의를 얻고 2021년 1학기 서울대학교 ‘형이상학’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내용 흐름은 수업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핸드아웃을 최대한 풀어 쓰려 노력했다. 본 글에는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며, 그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사전 문의 없이 무단으로 복제, 배포하는 행위는 금한다.


부분 변화의 퍼즐
(1) 이전-데카르트 = 이후-데카르트
(2) 이전-데카르트-마이너스 = 이후-데카르트-마이너스
(3) 이후-데카르트 = 이후-데카르트-마이너스
(4) 이전-데카르트 = 이전-데카르트 마이너스
; 부분전체론적 본질주의를 취하지 않는다면 부분 변화에 있어 데카르트가 지속했다는 (1)을 받아들일 수 있다
; 데카르트-마이너스라는 대상의 존재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2)를 받아들일 수 있다
; (3)이 참이라고 받아들였던 이유는, 두 대상 – 사고 이후의 데카르트와 사고 이후의 데카르트-마이너스 – 이 정확히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같은 물리적 부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즉 대상의 개별화가 대상의 물질 기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가정 하에 있었다
; 그러한 가정에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 대상이 물질 기반을 가지고 있기는 하고 대개 서로 다른 대상이라면 그 물질 기반이 다르겠지만, 어떤 경우 같은 물질 기반을 가지지만 그 물질 기반을 통해 온전히 개별화되는 것은 아니어서 서로 다른 대상일 수 있지 않은가?
; 이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부분 변화의 퍼즐에 대응해 보자

공점주의적 대응
; x와 y가 공점한다 = x와 y가 동시에 정확히 같은 공간을 점유한다

(3)은 사고 이후의 데카르트와 사고 이후의 데카르트-마이너스는 공점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대상이라고 추론하고 있다
; 서로 다른 두 대상이 공점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 서로 다른 두 대상이 공점하는 것이 가능한 케이스가 있겠는가?
; 유령이 벽을 넘어 갈 때 유령과 벽은 공점할 수 있지 않은가?
; 개념적 수준에서 공점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 그러나 설사 그런 사례의 공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데카르트와 데카르트-마이너스가 공점한다는 것과는 다른 양상인 것 같다
; 유령은 비물질적인 대상이어서 비물질적 대상과 물질적 대상 사이의 공점이 가능하다는 것은 개념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 물리적 대상에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서로 다른 물리적 대상이 공점하는 것이 가능할까?
; 미립자 수준으로 생각해 보면 어떤 미립자는 같은 공간을 동시에 점유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 그러나 데카르트와 데카르트-마이너스는 거시적 대상이므로, 다시 거시적인 물리적 대상에 한해서 생각해 보자
; 양자역학에 따른 원리적인 경우를 배제할 때, 거시적인 물리적 대상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대상이 공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
(유기적 신체 이론에 입각해서 답변하지 않고, 이것도 ‘사람’에 한해 답변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컵과 벽이 공점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서도, 데카르트와 데카르트-마이너스가 공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여지는 없는가?
; 그 차이가 있어서 두 사례를 다르게 분석해 볼 수는 없는가?
; 컵과 벽은 물질 부분을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컵과 벽의 공점을 받아들이려면 서로 다른 종류의 물질이 동시에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물질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충돌한다)
; 그러나 데카르트와 데카르트-마이너스의 경우, 데카르트와 데카르트-마이너스가 공점한다면 서로 다른 물질 부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공점하는 것이 아니다
; 두 대상은 물질 부분을 공유하면서 공점하는 것이므로 공점이 가능할 수 있다
; 공점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 내속이론가들 또한 이러한 생각 하에서 (3)을 거부할 수 있다
; 퍼즐은 (3)에서 두 대상이 공점하고 있으므로 같은 대상이라는 아이디어에 입각해서 진행되고 있고 그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 즉 데카르트와 데카르트-마이너스는 공점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대상일 수 있다
; 특히 서로 다른 물질 부분을 가지고 있으면서 공점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물질 부분을 공유하면서 공점하면서도 서로 다른 개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 데카르트는 사람이고, 데카르트-마이너스는 사람이 아닌 어떤 물질 덩어리이다
; 데카르트가 지속할 조건과 데카르트-마이너스가 지속할 조건은 다르다
; 데카르트는 왼손을 잃더라도 지속할 수 있었고 오른손을 잃더라도 지속할 수 있지만, 데카르트-마이너스는 정의상 왼손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기 때문에 오른손을 잃는다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 결국 사고 이후 시점에 데카르트와 데카르트-마이너스는 공점하고 있기는 하지만, 둘은 물질 부분을 공유함으로써 공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서로 다른 대상이면서도 공점이 가능한 경우이다


내속이론가가 단지 이 퍼즐을 해결하기 위해 임시방편적으로 공점주의를 받아들이는 대신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에 비추어 보아도 서로 다른 대상의 공점이 가능함을 보여줄 수 있다면, 내속이론가가 (3)을 거부함으로써 퍼즐에 대응하는 것이 독립적인 지지 근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실제로 공점주의자들은 퍼즐과 상관없이 공점이 가능하다는 것을 논증을 통해 적극적으로 보인다
; 우리가 일상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수용하고 있는 대상들에 한정해 보더라도 우리는 서로 다른 대상이 공점하는 경우를 자연스럽게 허용하고 있고 허용할 수밖에 없음을 논증을 통해 보여준다
; 그러한 논증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용어를 정의하자
; 진흙 덩이로부터 다비드상을 만들 때 진흙 알갱이들이 모여서 진흙 덩이를 구성(compose)한다, 진흙 알갱이들은 진흙 덩이의 부분들이다
; 다비드상은 진흙 덩이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진흙 덩이와 다비드상의 관계는 이룸(constitution) 관계이다
; 물질에 있어 composition 관계와 constitution 관계는 구분된다 (material constitution)
; 여러 개의 진흙 알갱이들이 하나의 진흙 덩이와 이루는 관계는 구성 관계(다대일의 관계, 여러 대상과 그 구성물의 관계), 그 하나의 진흙 덩이가 다비드상을 이루는 관계는 이룸 관계(일대일의 관계)이다
; 이때 물질 덩어리가 다비드상을 이루고 있을 때 물질 덩어리와 다비드상의 관계에 대해 그것이 동일성 관계라는 입장이 있고 동일하지 않다는 입장이 있다
; 공점주의자들은 이룸 관계가 동일성 관계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서로 다른 대상이지만 이룸 관계에 있다고 본다
; 그렇다면 진흙 덩이와 다비드상은 서로 다른 대상이면서도 공점할 수 있다
; 공점주의자들은 우리가 일상적인 직관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결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보인다

서로 다른 두 대상이 공점하는 경우는 material constitution의 경우에 해당한다
; 어떤 물질 기반이 있고 그 물질 기반에 해당하는 대상이 물질적으로 constitute하는 대상이 있을 때. constitute하는 물질 기반에 해당하는 대상과 그에 의해 constituted되는 대상은 공점하지만 서로 다른 대상이다

공점주의를 위한 논증
; 철수는 월요일에 여러 진흙 알갱이들이 모여 구성하고 있는 둥그런 진흙 덩이를 샀다
; 그 진흙 덩이를 ‘복덩이’라 불러 보자
; 화요일에 철수는 복덩이를 가지고 소조상을 만들었다
; 그 소조상을 ‘다비드’라고 불러 보자
(a) 월요일에 복덩이는 존재하고 다비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b) 화요일에 복덩이도 존재하고 다비드도 존재한다
(c) 복덩이와 다비드는 동일하지 않다
(d) 화요일에 복덩이와 다비드는 모든 부분을 공유하며 공점한다
(e) 따라서 서로 다른 두 대상이 동시에 모든 부분을 공유하며 공점할 수 있다
; 월요일에 복덩이는 존재했지만 다비드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 화요일에 복덩이는 여전히 존재한다
; 둥그런 모양에서 다비드상의 모양으로 모양을 바꾸더라도 복덩이는 그대로 복덩이이기 때문이다
; 설령 복덩이가 소멸했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로 모양이 달라졌을 때 소멸하는지에 대해 말하기 곤란할 것이다
; 한편 월요일에 다비드는 존재하지 않았고 화요일에 철수가 작업을 마쳤을 때 존재하기 시작했다
; 복덩이는 월요일부터 화요일까지 계속 지속하여 존재했고, 다비드는 월요일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화요일부터 존재했다
; 복덩이와 다비드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따라나오는 것 같다
; 그런데 화요일에 복덩이를 다 빚어서 다비드를 만들었을 때 복덩이와 다비드는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 이 경우 복덩이와 다비드는 분명 서로 다른 대상이지만 공점하고 있다
; 복덩이는 다비드의 물질 기반이 되고 있다, 복덩이가 다비드를 materially constitute하고 있다, 다비드는 복덩이로 이루어져 있다
; material constitution의 경우 constituting하는 복덩이와 constituted되는 다비드는 서로 다른 대상이다

대개의 경우 전속이론가는 공점주의를 거부한다
; 물질부분을 통해서만 대상을 개별화하려는 생각이 전속이론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 따라서 전속이론가는 물질부분에 있어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대상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 전속이론가는 이 논증에서 잘못된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 더하여, 공점주의의 논증은 공점하지만 서로 다른 두 대상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전속이론의 이론적 근거를 약화시킬 수 있다
; 따라서 전속이론가는 공점주의 논증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

전속이론가의 가능한 대응
; ‘다비드’라 하는 것은 어떤 실체가 아니어서 다비드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며 (b)를 거부함으로써 (c)를 거부할 수 있다
; 화요일에 없던 다비드가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며, 계속해서 지속하는 동일한 복덩이가 어떤 특정한 모양을 가지고 있을 때 복덩이가 다비드상의 모양을 가지고 있음을 가지고서 마치 복덩이와는 다른 어떤 대상으로서 다비드가 존재한다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 물질 기반에 해당하는 복덩이만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constitute하는 대상이란 사실 없다

다비드가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근거가 있는가?
; 반 인와겐이라면 (b)를 거부할 것이다
; 반 인와겐은 이 세상에 단순 입자나 유기체만이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 그런데 반 인와겐이라면 (b)뿐 아니라 (a)도 거부할 것이다
; 복덩이 또한 기본 입자들이 구성한 대상으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기본 입자들뿐이고 다만 복덩이는 원자들이 덩어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만약 복덩이는 존재하지만 다비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반 인와겐이 가지고 있는 근거와는 다른 근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른 가능한 전속이론적 대응
; (a)와 (b)는 대상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존재론적 직관에 기대어 있다
; 특정한 존재론에 입각해서 전속이론을 옹호하는 대신, 전속이론이 일상적 존재론적 직관을 유지한 상태에서도 논증에 대응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 복덩이는 월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지속하고, 다비드는 월요일에 존재하지 않고 화요일에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논증에 대응할 수 있을까?

; 이 논증에서 복덩이와 다비드는 하나의 지속체로서 파악되고 있다
; 지속체로서의 복덩이와 지속체로서의 다비드는 동일하지 않다
; 전속이론에 따랐을 때, 지속체로서의 복덩이인 복덩이의 시간 부분들의 합과 지속체로서의 다비드인 다비드의 시간 부분들의 합이 포함하고 있는 시간 부분들은 다르다
; 복덩이의 시간 부분들은 월요일에도 있고 화요일에도 있지만, 다비드의 시간 부분들은 화요일에만 있다
; 화요일의 한 시점만 놓고 본다면 복덩이와 다비드는 공점하고 있다, 같은 공간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 통시간적 관점에서 복덩이는 월요일 시간 부분과 화요일 시간 부분의 합이 되고, 다비드는 화요일 시간 부분의 합이 된다
; 따라서 전속이론에 따르면 (c)는 참이다
; 그러나 전속이론의 관점에서 (d)는 거짓이 된다
; 복덩이와 다비드는 모든 부분을 공유하며 공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간 부분을 공유하며 공점하고 있다
; 전속이론의 관점에서 부분에는 공간 부분뿐 아니라 시간 부분도 있기 때문에, 모든 부분을 공유한다는 (d)는 거짓이 된다
; 따라서 서로 다른 두 대상이 동시에 모든 부분을 공유하며 공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 복덩이와 다비드는 한 시점에 한정해서는 모든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 그러나 통시간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부분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만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 부분적으로 부분을 공유하지만 모든 부분에 있어서 동일한 것은 아닌 경우 그것은 전속이론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대상인 것 같다
; 부분적으로는 부분을 공유한다 하더라도 다른 물질 부분에 있어서 서로 다르기에 두 대상의 차이가 물질 부분의 차이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 이러한 방식으로 전속이론가는 (d)가 거짓이기에 서로 다른 두 대상의 공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속이론가의 관점에서 공점주의를 위한 논증은 무기력한 논증처럼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전속이론가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논증을 구성해 볼 수 있다
; 이 논증에 대해 전속이론가가 대응하는 방식은, 복덩이와 다비드는 시간 부분에 있어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이다
; 그런데 시간 부분에 있어서조차 모두 동일하지만 서로 다른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례가 있을 것 같다

사례를 바꾸어 보자
; 철수는 진흙 알갱이들을 뭉쳐서 다비드상의 상반신을 만들고, 또 뭉쳐서 다비드상의 하반신을 만들었다고 하자
; 화요일날 둘을 붙여서 다비드상을 만들었다고 하자
; 다비드상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진흙 덩이는 상반신과 하반신을 붙였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 그 진흙 덩이를 ‘복동이’라 해 보자
; 다비드 또한 상반신과 하반신을 붙였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 이때 복동이와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과 다비드가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은 같다
; 그리고 다비드상이 한번에 진흙 알갱이들로 산산조각 났을 때, 진흙 덩이인 복동이는 존재하지 않게 되며 다비드상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 이 사례에서 복동이와 다비드는 존재가 시작한 시점과 소멸한 시점이 일치한다

; 이때 전속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복동이를 이루고 있는 시간 부분들과 다비드를 이루고 있는 시간 부분들의 차이가 없다
; 다비드와 복동이는 모든 부분을 공유하며 공점하고 있다
; 이때 부분은 공간 부분뿐 아니라 시간 부분까지 포함한다
; 그럼에도 복동이와 다비드는 서로 다른 대상으로 생각되는 것 같다
;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만약 철수가 소조상을 없앨 때 진흙 덩이를 공 모양으로 찌그러뜨렸다 해 보자
; 그때 복동이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다비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 이처럼 복동이는 공 모양일 수 있었을 것 같지만 다비드는 공 모양일 수는 없었다
; 다비드와 복동이는 모든 부분을 공유하고 있더라도, 공 모양으로 있을 수 있었는지의 여부에 있어 차이가 있는 것 같다
; 따라서 다비드와 복동이를 다른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것 같다

공점주의를 위한 논증 2
(1′) 복동이와 다비드는 모든 부분(공간 및 시간)을 공유하며 공점한다
(2′) 복동이는 공 모양일 수 있으나 다비드는 공 모양일 수 없다
(3′) 복동이와 다비드는 동일하지 않다
(4′) 따라서, 서로 다른 두 대상이 모든 시점에 모든 부분을 공유하며 공점할 수 있다
; 복동이가 실제로 공 모양이었던 적은 없으나 공 모양일 수 있었던 가능성은 있는 것 같다
; 반면 다비드는 공 모양일 수조차 없었다, 그런 가능성조차 없는 것 같다
; 양상 속성 ‘공 모양일 수 있음’을 복동이는 가지고 있지만 다비드는 가지고 있지 않다
; 실제로 가지게 된 현실적 속성에서는 차이가 없더라도 가능성 수준에서 양상 속성에서 차이가 있으므로 복동이와 다비드는 서로 다르다 (동구원리)
; 따라서 서로 다른 두 대상이 모든 시점에 모든 부분을 공유하면서도 공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속이론가의 대응: 데이비드 루이스의 답변
; 일상적으로 참되게 말할 수 있는 진술인 (2′)으로부터 (3′)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 루이스는 양상 진술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 어떤 한 대상의 가능성은, 어떤 대상이 실제로는 F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F라는 속성을 가질 수 있었다’라는 양상 진술은, 표준적으로는 그 대상 자신이 F를 가지고 있는 가능세계가 있다는 것을 통해 이해된다
; 그러나 루이스는 그 대상의 상대역이 F를 가지고 있는 가능세계가 있다는 것을 통해 양상 진술을 이해했다
; 루이스에 의하면 (2′)이 의미하는 것은 ‘복동이는 어떠한 가능세계에서 공 모양을 하는 상대역을 가지고 있다’, ‘다비드는 어떠한 가능세계에서도 공 모양을 하는 상대역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된다
; 상대역 이론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2′)에서 (3′)이 따라나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 여전히 복동이와 다비드는 서로 다른 대상이다

; 그러나 루이스는, 동일성 관계와 달리 상대역 관계는 종류 개념에 상대적으로만 평가될 수 있는 관계라고 말한다
; 루이스에 따르면 어떤 대상 x가 있을 때 그 대상 x가 공 모양을 가지는 상대역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는 그 자체로 평가될 수 없다
; 그 대상 x를 어떤 종류 개념 하에서 이해하고 있는지가 먼저 주어지고 그것에 상대적으로만 상대역 관계를 판단할 수 있다
; 대상 x를 진흙덩이 종류 개념 하에서 파악하고 있다면 그 대상 x는 그런 파악 하에서 공 모양을 하는 상대역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반면 동일한 x에 대해 그것을 소조상 개념 하에서 파악할 수도 있는데, 소조상 개념 하에서 파악된 x에 대해 그 x가 공 모양 상대역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본다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 복동이와 다비드에 대해 ‘복동이가 공 모양을 하는 상대역을 가지고 있느냐’고 할 때 우리는 ‘복동이’라는 이름을 도입하여 암묵적으로 모종의 규약을 하고 있다
; 그 대상을 진흙 덩이의 개념 하에서 파악하는 것으로 규약하고 있는 것이다
; 반면 ‘다비드’라는 이름을 통해 그 대상을 지시할 때는 소조상 개념 하에서 대상을 파악한다는 규약이 개입되어 있다
; 복동이가 공 모양을 하는 상대역을 가지고 있다는 진술은 참이다
; 그 진술은 ‘복동이’라는 이름의 지시체를 복동이와 결부된 종류 개념인 진흙덩이 개념 하에서 파악하고, 그 대상이 공 모양을 하는 상대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 (2′)으로부터 (3′)이 추론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공 모양일 수 있음’이라는 양상 속성을 복동이는 가지고 다비드는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3’)을 추론한다
; 그런데 루이스의 관점에서 복동이가 ‘공 모양일 수 있음’이라는 양상 속성을 가진다는 주장은 엄밀히 말하면 참이 아니다
; 사실 그 주장이 말하는 것은 복동이가 진흙덩이 개념 하에서 ‘공 모양일 수 있음’이라는 양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단적으로는 ‘공 모양일 수 있음’과 같은 양상 속성은 없다
; 종류 개념에 상대적인 양상 속성만이 존재한다
; 진흙덩이 개념 하에서 ‘공 모양일 수 있음’이라는 그 양상 속성은 복동이가 가지는데, 그것은 다비드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소조상 개념 하에서 ‘공 모양일 수 있음’이라는 속성은 다비드도 가지고 있지 않고, 복동이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 전속이론의 관점에서 다비드와 복동이는 하나의 대상인데, 복동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는 진흙덩이 개념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고 지시하고 있는 것이며, 다비드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는 동일한 대상을 소조상 개념을 통해 파악하고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 다비드와 복동이는 진흙덩이 개념 하에서 ‘공 모양일 수 있음’이라는 속성을 둘 다 가지고, 소조상 개념 하에서 ‘공 모양일 수 있음’이라는 속성을 둘 다 가지지 않는다
; 따라서 복동이와 다비드가 동일하지 않다

; 물론 이런 답변은 상대역 이론과 상대역 관계가 종류 개념 하에서 상대적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견해에 입각하고 있다
; 즉 한 대상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그 대상의 상대역이 다른 가능세계에서 어떠한지에 의해 파악된다는 것에 의존해서만 답변될 수 있다
; 물론 통세계적 동일성을 받아들이며 한 대상에게 성립하는 가능성은 그 대상 자체에 원천이 있는 것이라 믿는 크립키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 답변이 수용되지 않을 것이다
; 그런 입장에서는 루이스의 답변이 작동하지 않겠지만 루이스와 같은 전속이론의 관점에서는 위와 같이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본다면 대상의 잠재성은 실제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성에 입각해 있다
; 복동이는 공 모양을 하고서도 복동이로 지속할 수 있는데, 그것은 진흙 덩이라는 종류의 본성이 그런 잠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소조상은 소조상의 본성상 공 모양으로는 소조상일 수 없다, 공 모양으로 되면서까지도 지속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그것은 바로 소조상의 본성에서 나온다
; 둘 다 진흙 알갱이로 완전히 떨어져 나갔을 때 지속할 수 있는 잠재성을 본성에 의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점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직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대상의 개별화는 그것들의 종류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종류는 본성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인 것이다
; 반면 전속이론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으며,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질은 궁극적으로 그것을 이루고 있는 물질 기반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부분 변화의 퍼즐로 돌아가 보자
; 내속이론가는 공점주의를 기반으로 전제 (3)을 거부할 수 있다
; 내속이론가의 관점에서 대상의 개별화는 객관적인 사실인 그 대상이 어떤 종류인가, 그리고 그 종류의 본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본성에 의해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잠재성에 의해 대상이 개별화된다
; 따라서 사고 이후의 데카르트와 사고 이후의 데카르트-마이너스는 물질 부분을 공유한다 하더라도 서로 구별될 수 있다
; 그러나 이것만으로 전속이론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고 할 수는 없다
; 전속이론가는 공점 현상에 대해 얼마든지 그 나름의 기준에 따라 그 현상을 재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문제
; 한 시점에 놓고 봤을 때 대상의 개별화가 정말 물질 기반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가?
; (공점 가능성을 통해 살펴보았을 때는 통시간적 고려를 했다)

(가) 책상 위에 고양이가 있다
(나) 책상 위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다) 만약 n개의 털을 가진 대상이 고양이면, n-1개의 털을 가진 대상도 고양이다
(라) n개의 털을 가진 대상은 고양이다
(마) 책상 위에 많은 고양이가 있다
; 직관적으로 책상 위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 것 같다
; 대상의 개별화가 물질 부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굉장히 많은 고양이가 있게 된다
; 만 개의 털이라면 최소한 만 개의 고양이가 있게 되어 버린다
; 순전히 물질 기반을 통해 개체의 개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일상적 직관과 충돌하는, 고양이가 굉장히 많다는 결론이 따라나오는 것 같다
; 이 퍼즐에 전속이론가와 공점주의자는 어떻게 대응할까? 직접 생각해 보자
; 이를 통해 전속이론과 공점주의를 통한 내속이론 중 어떤 입장이 더 옳을지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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