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속성 변화에 대한 전속이론적 이해

본 [형이상학] 항목은 교수님께 동의를 얻고 2021년 1학기 서울대학교 ‘형이상학’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내용 흐름은 수업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핸드아웃을 최대한 풀어 쓰려 노력했다. 본 글에는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며, 그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사전 문의 없이 무단으로 복제, 배포하는 행위는 금한다.


전속이론과 내속이론 중 어떤 것이 개체의 지속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가?
; 그것을 따지는 데 지속과 관련된 핵심적인 현상인 변화 현상을 살펴보자
; 지속에 대한 각 견해가 개체가 지속하면서 변화하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지 살펴보자

속성에서의 변화와 부분에서의 변화, 두 변화 양상을 살펴보자
;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구분했을 때 변화는 속성 변화와 실체 변화로 나눌 수 있다
; 대상의 존재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생성이나 소멸과 같은 변화를 실체 변화라 한다
; 그런 변화가 아닌 변화를 속성 변화라 한다(ex. 양적 변화, 질적 변화, 위치의 변화, … )
; 이때 속성 변화하는 개체는 여전히 지속하지만 변화한다
; 실체 변화는 우리의 논의 대상은 아니다
; 지속이 성립하는 한에 있어서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 속성 변화를 넓은 의미에서의 속성 변화와 좁은 의미에서의 속성 변화로 구별해 볼 수 있다
; 속성에서의 변화와 부분에서의 변화를 구분할 때 ‘속성에서의 변화’의 속성은 특정하게 한정된 의미에서의 속성이다
; 물리적 부분에서의 양적 변화 역시 넓은 의미에서 속성 변화로 볼 수 있지만(‘오른팔을 가지고 있음’이라는 속성을 더 이상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것과 독립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속성 변화를 구분해서 좁은 의미의 속성 변화로 보자
; 좁은 의미의 속성에서의 변화와 부분에서의 변화를 살펴보자

속성에서의 변화
; 전속이론과 내속이론에서 속성에서의 변화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 간단히 모양에서의 변화를 이해해 보자

(1) 영희는 시간 t1에서 t2 동안 지속한다
(2) 시간 t1에 영희는 곧은 모양이다 (영희는 서 있었다)
(3) 시간 t2에 영희는 굽은 모양이다 (영희는 앉아 있다)
; 영희가 모양에서의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 영희는 최소한 시간 t1에서 t2까지 지속해야 하며, t1에서 영희는 곧은 모양이었고 t2에서 영희는 굽은 모양이었어야 한다
; (1), (2), (3)를 만족한다면 영희는 모양에서 변화를 겪었다고 말할 수 있다
; 이는 전속이론과 내속이론을 가정하지 않고, 모양의 변화와 관련해 직관적 수준에서 이해한 것이다
; (1), (2), (3)은 각 이론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전속이론에서 (1), (2), (3)은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1.1) 영희는 시간 t1에서 t2에 존재하는 시간부분들의 합이다
(1.2) 영희는 t1에 존재하는 곧은 모양의 시간부분을 가진다
(1.3) 영희는 t2에 존재하는 굽은 모양의 시간부분을 가진다
; (1.1), (1.2), (1.3)이 성립한다면 영희가 모양에서 변화를 겪었다고 할 수 있다
; 전속이론의 이러한 이해는 개체의 모양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 곧은 모양의 시간 부분과 굽은 모양의 시간 부분이 하필 시간에 인접하게 있다는 사실이 성립한다고 해서 그것이 변화라고 할 수 있는가?
; 이런 의심이 생기게끔 하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변화가 성립하기 위해서 만족되어야 하는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유비적으로 생각해 보자
; 전속이론에서는 시간 부분에서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을 통해 질적 변화를 포착하고자 한다
; 공간 부분에 대해 생각해서, 왼손은 얼음을 만지고 있고 오른손은 뜨거운 난로를 만지고 있다고 해 보자
; 왼손은 차갑고 오른손은 뜨거울 때 내가 변화를 겪고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 공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은 그 개체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과 관련해서 말해주는 바가 없는 것 같다
; 공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가 변화와 무관한 것이라면, 시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를 왜 변화가 성립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 덧붙여 전속이론이 기반하고 있는 4차원주의에서 시간 부분이 특별한 종류의 물리적 대상은 아니다
; 3차원적으로 공간 부분이 퍼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축이 더 있고 거기에 연장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 3차원적 공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가 변화와 무관하다면 시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가 변화를 성립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 같다
; 시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가 성립함을 통해 변화가 성립했다는 전속이론적 이해는 제대로 된 이해 방식이 될 수 없다
; 전속 이론은 속성에서의 변화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전속이론의 대응
; 공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 역시 변화로 볼 수 있지 않을까?
; 한 쪽은 차갑고 점점 온도가 높아지며 반대편은 뜨겁다면 그것을 변화로 볼 수 있지 않을까?
; 유사하게 어떤 도로가 비포장되어 있다가 어느 지점부터 포장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변화가 성립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제시한 사례들에서 관점이나 시점을 고정한다면 변화로 관찰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 공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에 대해 우리가 유비적으로 마치 변화를 겪은 것처럼 말할 때 어떤 특정한 방향성을 상정해야 하는데, 그 방향성은 아주 주관적인 것 같다
; 어떤 객관적인 방향성이 있어 그것을 따라간다기보다는 우리의 관심에 따라 방향성을 임의로 상정한 것 같다
; 그렇다면 공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가 유비적으로는 변화한다고 할 수 있을지언정 실제로 변화가 있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 그런데 한편 전속이론가의 대응에서 전제된 방향성이 객관적인 방향성이 아니기 때문에 공간에서의 질적 차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변화는 아니지만, 그와 같은 제안이 가지는 함의가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 공간과 달리 시간의 경우에는 t1에서 t2로 가는 방향성은 주관적이지 않다
; 시간의 방향성은 세계의 객관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 따라서 공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는 변화를 함축하고 있지 않지만, 시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는 객관적인 시간의 방향성과 더불어 변화에 대한 근거가 된다
; 이때 시간의 방향성이 정말 객관적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겠지만, 분명 시간의 방향성은 어떤 객관적인 양상을 띄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가령 엔트로피 증가의 방향성)

종합하자면,
; 전속이론에서는 F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가 G라는 속성을 가지면서 변화하는 것을, 시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를 통해 설명했다
; 공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는 변화와 무관한 것 같은데, 시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는 왜 변화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어려움이 제기된다
; 이 세계의 객관적 양상 혹은 원초적 물리적 사실로서의 시간의 방향성을 호소함으로써, 시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는 공간 부분에서의 질적 차이와 달리 개체의 변화와 유관한 양상을 띤다


여기까지 살핀다면, 전속이론은 질적 속성에서의 변화를 제대로 포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 말라서 잎이 축 처져 있던 바질에 물을 주었더니 싱그러워지며 잎이 올라갔다고 해 보자
; 우리는 ‘바질 잎이 왜 다시 싱그러워졌는가?’라는 변화의 질문에 대해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답변이 전속이론에서 성립할 수 있는가?

; t2에서의 바질 시간 부분이 싱그러운 이유에 대해 우리는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라고 답하는데, 이때 물을 받은 것은 t2의 바질 시간 부분이 아니라 말라서 잎이 처져 있던 t1의 바질 시간 부분이다
; t1의 바질 시간 부분에 물을 준 것은 t2의 바질 시간 부분이 싱그러운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 같다
; 즉 바질이 싱그러운 이유에 대한 일상적 답변, 자연스러운 설명이 전속이론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실체이론적 내속이론의 관점에서 변화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설명을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전속이론은 더욱 이상해지는 것 같다
; 바질은 물을 흡수해서 광합성을 하고 잎을 싱그럽게 하는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는 실체이고 내속함으로써 지속한다
; 물을 흡수하고 그 힘을 행사한 결과로서 잎이 싱그럽게 된 것이라고 분석한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답변이 잘 이해된다
; 물을 받은 것과 잎이 싱그럽게 된 것이 모두 동일한 하나의 개체이다
; 내속이론은 속성의 변화를 겪는 것은 어떤 개체가 F라는 속성을 가졌다가 F를 잃어버리거나 혹은 F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가 F를 가지게 되거나, 두 시점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동일한 하나의 개체가 있음이 요구된다
; 그렇지 않다면 일상적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변화가 너무나 신비스러운 현상이 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개체에서 속성의 변화는 왜 발생했는가에 대한 자연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다시 잎이 싱그러워진 바로 그 대상에 물을 주었다고 전제하고 말하는 것 같다
; 즉 물을 받은 대상과 그걸 통해 그 결과로 어떤 속성이 변화된 대상이 동일한 대상임을 전제하는 듯한데, 전속이론에서는 그렇게 이해될 수 없다
; 전속이론에서는 어떤 개체도 통시간적 동일성을 가지지 못한다, 근본적 수준에서 모든 개체는 시간 한정적 개체다
; 그렇다면 ‘바질의 잎은 왜 다시 싱그러워졌는가?’에 대해 전속이론가는 ‘시들어 있는 바질에 물을 주었기 때문이다’라는 답변을 할 수 없다
; 시들어 있는 바질의 시간 부분과 싱그러운 바질의 시간 부분이 완전히 별개의 대상이라면 바질이 싱그러워진 것은 일종의 기적과 같은 것이 된다
; 자연적인 속성 변화 현상을 신비로운 대상으로, 일종의 기적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 같다
; 전속 이론에서는 속성 변화에 대한 자연스러운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전속이론가들의 가능한 대응
; 엉덩이에 링거를 맞아서 목이 나은 사례에서 부분에서의 상호적 인과관계가 성립함을 생각해 보면, 시간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상호적 인과관계가 성립함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 궁극적으로, 시들어 있는 바질의 시간 부분과 싱그러운 바질의 시간 부분이 있고 두 시간 부분은 엄연히 별개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별개의 두 대상에 대해서도 모종의 인과관계, 자연적인 연결이 성립함을 보여준다면 통시간적 동일성을 가지고 있는 어떤 개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싱그러운 바질이 어떻게 나타났는가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 전속이론의 관점에서 통시간적 동일성을 맺고 있는 것은 없지만, 두 시간 부분 사이의 모종의 자연적인 연결을 통해 속성 변화를 설명해 보자

; 전속이론가는 동일한 하나의 바질이 속성 변화 이전과 이후에 동일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왜 여기 싱그러운 바질이 있는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
; 물을 받은 바질의 시간 부분과 싱그러운 바질의 시간 부분 사이에 자연적인 연결이 있다는 것,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 그 인과관계는 어떤 자연법칙적 관계일 것이다
; 이때 전속이론가가 기댈 수 있는 인과관계는 어떤 것이 있을까
; 두 개의 전자 e1, e2를 생각해 보자
; 서로 멀어진 e1과 e2에 대해, 전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전자가 본성에 의해 가지는 인과력을 통해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연법칙은 개체의 본성들간의 성질, 개체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관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기술로 이해될 수 있다
; 전자라는 개체가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과력을 상정하는 이런 관점은 내속이론가에게 자연스럽게 채택될 것 같다

; 반면 전속이론의 관점에서는 전속이론가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성, 그리고 본성에 의해 가지는 인과력을 신비스러운 것으로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 대상의 본성에 의해 가지고 있는 인과력을 거부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로 흄을 생각할 수 있다
; 흄에 의하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관찰할 때 대상이 모종의 인과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행사한다고 상식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인과력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직접 관찰한 바가 없다
;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관찰한 것은 소위 그 인과력을 통해 행사한 결과들이다
; 인과력은 실체 없이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신비스러운 어떤 것이다
; 뉴턴은 질량을 가진 물체는 질량을 가진 다른 물체를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방식으로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행사한다고 말했다
; 흄은 이를 신비스러운 개념으로 보고 거부했다
; 힘에 의존하지 않고서 경험을 통해 물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질들만이 실재하는 것이다
; 우리는 상식적으로 그 이면에 그것을 그렇게 하게끔 하는 본성을 가지는 실체라는 것이 있을 것이라 상정하지만 흄의 경험론적 관점에서 이는 미신적이다
; 흄적 관점에서 자연법칙이란 개체가 가지는 본성들간의 관계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물체의 기초적 물리적 성질들간의 규칙적 관계를 기술하는 것이다
; 어떤 성질과 어떤 성질이 규칙적으로 함께 연동하고 있는가를 기술하는 것이다
; 전속이론은 이런 흄적인 이해를 받아들일 수 있다
; 만유인력 법칙 역시 질량을 가진 물체가 본성을 통해 무언가 끌어당기는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성질을 가지면 이러이러한 만큼 거리가 가까워지는 양상을 띠는 것이 세계의 규칙성을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런 성질들을 가지는 물체 사이의 그런 방식으로 규칙성이 나타나는지 한번 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 흄적 관점에서는 이는 더 이상 답변될 수 없다
; 그것은 이 세계에 우연적으로 성립하는 brute fact이다, 자연세계에 성립하는 근본적인 규칙성이다
; 전속이론은 이런 관점에서 속성변화, 왜 우리가 싱그러운 바질을 관찰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자연적인 설명을 줄 수 있다
; 우리가 기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자연법칙을 통해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것인데, 전속이론의 관점에서 자연법칙은 자연의 궁극적인 규칙성에 다름 아닌 것이다
; 시든 바질의 시간 부분에 물을 주는 사건이 있으면 그 다음에 싱그러운 바질의 시간 부분이 관찰될 것이라는 것은 궁극적인 자연의 규칙성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 결국 자연적인 설명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기적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 시든 바질의 시간 부분에 물을 주는 유형의 사건이 있으면 우리는 자연법칙을 통해 싱그러운 바질의 시간 부분이 나타날 것임을 예측할 수 있고 그 예측에 입각해 실제 사건이 발생한다
;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은 없다
; 전속이론의 관점에서 속성 변화에 대한 내속이론적 설명을 액면 그대로 제공할 수는 없지만, 그에 상응하는, 여전히 기적을 허용하지 않는 자연적인 설명을 줄 수 있다고 대응할 수 있다


두 입장의 근본적인 차이
; 전속이론가의 이러한 답변은 ‘현상에 대한 설명’에 대한 어떤 특정한 견해에 입각해 있는 것 같다
; 이 견해에서 특정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자연적 설명은, A 유형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B 유형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연의 규칙성이라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 즉, B 유형의 어떤 특정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에 대해 A 유형의 특정한 사건이 있고 A 유형의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B 유형의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이 자연의 규칙성이라면, B 유형의 사건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제공한 것이다
; 이는 A 사건의 발생과 A 유형과 B 유형 사이의 규칙성으로부터 B 유형 사건의 발생이 자연법칙적으로 함축된다는 아이디어이다
; 일반적인 규칙성의 사례임을 보여주는 것이 현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Men do not think they know a thing unless they have grasped the ‘why’ of it (Physics)’를 보면,
;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는 자연현상에 대한 흄적 설명은 진정한 설명이 아닐 것이다
; 우리는 왜 그런 규칙성이 성립하는가를 더 물을 수 있지만, 흄적 모형에서는 더 이상 설명이 주어지지 않는다
;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는 어떤 유형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어떤 유형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에 대한 예측은 할 수 있더라도, 여전히 그것이 왜 성립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 반면 흄적 견해에서 설명과 예측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 우리가 일상적으로 어떤 것은 설명이고 어떤 것은 예측이라고 말하는 것은 순전히 시간 상대적인 것이다
; 먼저 발생한 것을 알고서 그것을 규칙성을 통해 포섭하면 설명이고, 발생하기 전에 규칙성을 통해 포섭한다면 예측이다
; 예측하는 것과 설명하는 것은 동등하다
;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예측하는 것과 설명하는 것은 다르다
; 어떤 규칙성을 바탕으로 예측은 할 수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것에 대한 ‘why’를 더 물을 수 있는데 그에 대한 답변을 얻지 못한다면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설명적인 요구를 강하게 받는다면 결국 개체의 본성에 호소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결국 ‘바질이 본성상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와 같이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전속이론이 속성 변화를 제대로 포착하고 있는가에 대한 내속이론적 우려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내속이론적 아이디어와 전속이론적 아이디어는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적 활동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달리 이해한다는 것이다
; 전속이론에서는 어떤 예측력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우리의 지적 활동이 충분히 완수될 수 있다면 내속이론적 관점에서는 아직 할 것이 남아 있다
; 오늘날 관점에서 더 대중적인 설명모형은 전속이론이 될 것이다
; 우리는 대상의 본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 그처럼 전속이론적 설명모형이 대중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 우리의 지적 욕구는 왜 그것이 성립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계속 던지고 싶어 한다

더하여, 현재 관점에서 보자면 흄적 설명 모형이 더 대중적이지만, 대중적인 것을 넘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설명 모형이 문제적이기 때문에 흄적 설명 모형이 더 대중적이라고 볼 여지가 있는가?
; 전속이론가들이 내속이론적인 설명방식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문제 삼을 수 있을지 모른다
; 아리스토텔레스적 설명 모형에서의 개체의 본성을 통한 설명이 정말 과학적인 설명인가? 설명적 역할을 하는가?

; 가령, 아편은 왜 졸음을 유발하는가에 대해 물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적 설명은 ‘아편은 본성상 졸음을 유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일 것이다
; 하나마나 한 소리 아닌가? 본성적 힘을 통한 현상의 설명을 진정한 의미의 설명이라 할 수 있겠는가?
; 기껏해야 사소한, 아무런 설명적 역할도 하지 못하는 설명만을 제공할 뿐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 설명모형은 문제적이고 전혀 과학적이지 않으므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 ‘아편은 본성상 졸음을 유발한다’라는 답변이 적절한 맥락이 있을까?
; 늘 아편과 함께 어떤 것을 먹어서, 아편이 졸음을 유발하는 것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유의미한 답변일 될 수 있을 것이다
; 반면 아편이 졸음을 유발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의 어떤 성분이 어떤 기제를 통해 졸음을 유발하는지 묻는 맥락에서 같은 답변은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고 사소한 답변이 된다
; ‘아편이 본성상 졸음을 유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라는 대답이 아예 설명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 흄적 설명에 대한 이해와 아리스토텔레스적 설명에 대한 이해 중 어떤 것이 이 세계에 대한 올바른 접근인지, 지적 활동을 하는 데에 있어 어떤 이해방식을 수용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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