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부분 변화의 퍼즐에 대한 내속이론의 대응: 치좀, 기치, 반 인와겐

본 [형이상학] 항목은 교수님께 동의를 얻고 2021년 1학기 서울대학교 ‘형이상학’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내용 흐름은 수업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핸드아웃을 최대한 풀어 쓰려 노력했다. 본 글에는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며, 그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사전 문의 없이 무단으로 복제, 배포하는 행위는 금한다.


부분 변화의 퍼즐에 대한 내속이론의 다양한 대응을 차례로 살펴보자

치좀의 부분전체론적 본질주의에 입각한 대응
; 이 퍼즐은 작동하는 데에 있어 동일한 대상이 부분의 변화 속에서도 지속할 수 있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 이때 지속한다는 것은 내속이론의 설명과 같이 수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 치좀은 그러한 가정을 부정한다

치좀에 따르면,
; 어떤 대상이라 하더라도 원래 가지고 있던 부분을 잃고서도 지속할 수 없다
; 어떤 대상은 그 부분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에만 지속한다
; 어떤 대상이라도 그 대상은 모든 부분을 본질적으로 가진다, 부분을 잃어버린다면 더 이상 그 대상이 아니게 된다 (부분전체론적 본질주의)

부분전체론적 본질주의가 참이면 어떠한 대상도 부분을 잃고서 지속할 수 없다
; 머그에 금이 간다면 더 이상 이전의 머그는 지속하지 않는다, 같은 대상이 아니게 된다
; 이러한 이해는 우리의 일상적 이해와 다른 것 같다
; 우리는 어제의 머그와 오늘 금이 간 머그를 같은 머그라고 생각한다
; 치좀은 이러한 일상적 진술은 참이라고 답한다
; 갑과 을이 같다고 말할 때의 ‘같다’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 엄격하고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같음 관계를 지시하는 ‘같다’라는 단어의 사용, 느슨하고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같음을 표현하기 위한 ‘같다’라는 단어의 사용이 있다
; 엄격하고 철학적인 의미의 단어 ‘같다’가 표현하는 것은 수적 동일성 관계, ‘=’로 표현하는 그 관계이다
; 느슨하고 일상적인 의미의 단어 ‘같다’가 표현하는 것은 갑과 을이 수적으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연속적이고 유사한 연쇄를 이루고 있는 것들에 포함되는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 어제의 머그와 금이 간 오늘의 머그가 같다고 이야기할 때 ‘같다’는 엄격하고 철학적 의미의 같음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니라 느슨하고 일상적 의미의 같음을 표현하려 한 것이기에 이 일상적 문장은 참으로 이해될 수 있다
; 반면 치좀은 우리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다’라고 할 때 같음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엄격하고 철학적 의미에서의 같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 사람의 지속과 관련해서 이야기할 때 ‘같다’라는 표현은 통시간적 동일성을 의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그와 관련해서 이야기할 때와 사람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 왜 사람의 경우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수적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가?
; 사람의 경우에는 의식에 의한 통합성이 있다
; 시간에 걸쳐 있긴 하더라도 강한 의미의 통합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머그에는 그러한 통합성이 없다
; 어떤 의미에서 통합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의식적인 존재자인 우리가 유사한 것들의 연속체로 있는 것들을 하나로 통합해 주기 때문이다
; 즉 머그는 우리의 의식에 의존해서만 통합성을 갖는다
; 반면 ‘나’라는 주어를 사용해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과는 견줄 수 없는 강력한 통합성이 있는 것 같다
; 따라서 사람의 경우 대개 ‘같다’라는 표현은 엄격하고 철학적 의미에서의 같음을 표현하도록 의도해서 사용한다
; 이처럼 책상이나 머그와 달리 사람은 수적 동일성을 만족하고 있는 대상이다
; 사람 아닌 대상에 대해서도 같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수적 동일성을 의미하도록 사용하는 경우가 있을까?
; 자기 자신밖에는 부분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기본 입자에 대해서는 엄밀한 수적 동일성을 의미하여 같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다’라고 할 때 수적 동일성을 의미하도록 사용하는 것이라면, 사람이 부분을 잃어버리고서도 지속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상충하는 것이 아닌가?
; 치좀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몸과 우리는 구별되는 대상이다
; ‘어제의 나의 몸과 오늘의 나의 몸은 같은 몸이다’라고 할 때 같음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느슨하고 일상적 의미에서의 사용이다
; 우리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몸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 부분을 잃어버리고서도 지속할 수 있다고 할 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어떤 부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이 부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 몸이 부분을 잃어버리게 되면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같은 대상이 아니지만, 우리는 일상적으로 ‘어제 나의 몸과 오늘 나의 몸은 같다’라고 참되게 말할 수 있다

치좀 견해에서 부분 변화의 퍼즐을 살펴보자
(1) 이전-데카르트 = 이후-데카르트
(2) 이전-데카르트-마이너스 = 이후-데카르트-마이너스
(3) 이후-데카르트 = 이후-데카르트-마이너스
(4) 이전-데카르트 = 이전-데카르트 마이너스
; 사고 이전의 데카르트와 사고 이후의 데카르트가 동일하다는 진술 (1)이 참이기 위해서 데카르트는 사람을 지시해야 한다
; 그런데 그렇다면 사고 이후의 데카르트와 사고 이후의 데카르트-마이너스가 동일하다는 진술 (3)은 참일 수 없다
; 사고 이후의 데카르트-마이너스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 몸의 일부를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또한 사고 이후의 데카르트를 사람의 신체로 이해하게 되면 (3)은 참이 되지만 (1)은 수적 동일성을 의미하지 않게 되므로 참이 되지 않는다
; 치좀의 부분전체론적 본질주의를 받아들이게 되면 (1), (2), (3)은 동시에 참일 수 없다, 따라서 (4)가 따라나오지 않는다

치좀의 견해가 담고 있는 주장
; 사람과 사람의 몸이 다르다는 생각에 입각하고 있다
; 우리가 우리의 몸과는 다르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 데카르트적 영혼, 비물질적 영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 그렇다면 물리주의와는 결별하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치좀의 견해가 사람이 비물질적 영혼이라는 것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 가령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생 동안 부분의 변화 없이 지속하는 것이 있어서 그게 우리일 수 있다(일생 동안 변화가 없는 두뇌의 어떤 부분이 사람이다 등의 주장처럼)
; 치좀의 견해에서 사람은 우리의 몸과는 구별되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물질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데카르트적 영혼과 같은 존재자로 볼 이유는 없다
; 그것과는 또 다른 방식의 비물리주의를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치좀에 있어 사람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은 다른 이론적 맥락에서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 자유의지에 관한 맥락에서이다
; 행위자로서 사람이 물리적 연쇄를 통해 행위할 때 그것이 자유행위이기 위해서는 선행 조건에 의해 모든 것이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 연쇄의 어느 지점에서 사람은 그 자체로 인과력을 행사해야 한다
; 그때 사람을 인과적으로 결정짓는, 그렇게 행사하도록 하는 것은 없어야 한다
; 사람이 그렇게 이해되어야 자유의지가 확보된다
; 이처럼 부분 변화의 퍼즐과는 별도의 이론적 맥락에서 부분전체론적 본질주의가 수행하는 이론적 역할이 있을 수 있다


기치의 상대적 동일성을 통한 대응
; (내속이론의 각 대응이 유력한 대응은 아니며 각 견해를 받아들이는 입장은 사실 드물긴 하다, 각 개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는 데에 집중하자)

; 우리는 ‘동구는 하나이다(a)’가 불완전한 문장이라 생각할 수 있다
; (a)는 그 자체로 완전한 문장, 그 자체로 참은 아니며 다른 참인 진술이 있고 그 참에 의존해서 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가령 ‘동구는 한 F이다(b)’는 완전한 의미를 가지는 참인 진술이다
; 이때 ‘F’는 종류 용어(sortal term)으로 가령 (b)는 ‘동구는 한 마리 개이다’와 같은 진술이다
; 이처럼 대상을 개별화하는 것은 항상 종류에 상대적인, 종류 의존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 같다
; 동구는 어떤 종류에 상대적으로 개별화될 때에만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
; 그 자체로는 온전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 (a)는 온전한 의미를 가지는 (b)가 참인 덕분에 참인 것 같다
; 우리가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특정한 종류의 한 사례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듯하다
; 더하여 우리의 인식적 작동 방식,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보면 실제로 그런 것 같다
; 아리스토텔레스적 견해에서는 인식적 작동 방식은 대개의 경우 세계에 실재하는 어떤 것을 반영한다
; 반대의 입장에 따르면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우리에 의존하는 것일 뿐이고 우리의 관심에 따라 특징들을 바탕으로 서로 다르게 분류하는 것일 것이다
; 그 이면에 있는 형이상학적 입장이 어떠하든간에, 대상의 개별화가 종류 의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굉장히 상식적인 것 같다

특히 프레게는 개별화는 종류 상대적이라고 말하는데, 동일성 관계와 관련해서는 그것이 개체들 사이의 성립하는 절대적인 관계라고 가정한다(절대적 동일성 견해)
; 프레게에 따르면 갑과 을이 있을 때 갑과 을은 동일성 관계를 절대적으로 가지고 있거나, 동일성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 갑과 을이 동일하다는 진술이 어떤 종류에 상대적으로는 참이고 어떤 종류에 상대적으로는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종류에 의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갑과 을은 동일하거나 동일하지 않다
; 이처럼 프레게는 개체의 개별화에 대해서는 종류 상대적이라고 보지만, 동일성 관계 자체는 절대적 관계라고 본다
cf. 반면 기치는 개별화뿐 아니라 동일성 관계 또한 종류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상대적 동일성 견해)

; 아침에 동쪽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인 샛별을 등지고 나타나는 강아지를 ‘동구’라 부른다 해 보자
; 저녁에 서쪽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별인 개밥바라기를 향해 걸어가는 강아지를 ‘서구’라 부른다 해 보자
; 실제로 샛별이 개밥바라기이고, 동구가 서구였다고 해 보자
; 이 상황에 대해 절대적 동일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상대적 동일성을 주장하는 입장은 어떻게 다른가?

‘샛별은 개밥바라기와 같고, 동구는 서구와 같다(c)’에 대해,
; 프레게는 (c)가 그 자체로 참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기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 프레게의 입장에서 샛별과 개밥바라기 사이에 성립하는 동일성 관계는 동구와 서구 사이에 성립하는 동일성 관계와 같다
; 기치의 입장에서 (c)가 참이라면 그것은 ‘샛별은 개밥바라기와 같은 행성이고, 동구와 서구는 같은 개이다(d)’가 참이기 때문이다
; ‘같다’는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같은 개임’, ‘같은 행성임’, ‘같은 사람임’과 같이 ‘같다’라는 술어는 종류 상대적이고 종류 의존적이다
; 샛별과 개밥바라기 사이에 성립하는 ‘같은 행성임’이라는 관계는 동구와 서구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는 아니다
; 샛별과 개밥바라기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는 ‘같은 행성임’, 동구와 서구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는 ‘같은 개임’이다
; 두 관계는 서로 다른 관계이다
; 그 자체로 성립하는 ‘같다’라는 관계는 없다

상대적 동일성 견해를 받아들였을 때 따라나오는 흥미로운 귀결
; 만약 철수와 영수가 같은 F라고 해 보자
; F와는 다른 종류 G에 대해 ‘철수와 영수가 같은 G이다’가 반드시 성립하는가?
; ‘같은 F임’과 ‘같은 G임’은 서로 다른 관계이기 때문에 철수와 영수가 ‘같은 F임’ 관계를 맺으면서 ‘같은 G임’ 관계는 맺고 있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 가령 갑돌이가 애벌레를 지나 나비 갑순이가 되었다고 해 보자
; 이때 ‘갑돌이와 갑순이는 같은 곤충이다’는 참이다
; 갑돌이와 갑순이는 ‘같은 곤충임’이라는 관계를 맺고 있다
; 그러나 ‘갑돌이와 갑순이는 같은 나비다’는 거짓이다
; 갑돌이와 갑순이는 ‘같은 나비임’이라는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다

상대적 동일성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귀결에 따라 부분 변화의 퍼즐에 대해 대응할 여지가 생긴다
; 철수와 영수가 같은 F이지만 같은 G가 아닐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1) 이전-데카르트 = 이후-데카르트
(2) 이전-데카르트-마이너스 = 이후-데카르트-마이너스
(3) 이후-데카르트 = 이후-데카르트-마이너스
(4) 이전-데카르트 = 이전-데카르트 마이너스
; 부분 변화의 퍼즐은 (4)를 이끌어내는 데에 (1), (2), (3)에서의 동일성의 이행성에 입각하고 있다
; 기치의 관점에서 보면 (1), (2), (3)은 그 자체로 무의미하거나, 참으로 해석한다면 그 자체로 참이 아니고 상대적 동일성에 의해 참인 진술이 있어서 그 덕분에 참인 것이다
; (1)이 참이라면 그 자체로 참이 아니라 ‘사고 이전의 데카르트와 사고 이후의 데카르트는 같은 사람이다’라는 분석을 통해 참이 된다
; (2)가 참이라면 ‘사고 이전의 데카르트-마이너스와 사고 이후의 데카르트-마이너스는 같은 물질 덩이이다’라는 분석을 통해 참이 된다
; 그런데 ‘같은 사람임’이라는 관계와 ‘같은 물질 덩이임’이라는 관계는 서로 다른 관계이다
; 따라서 (1), (2), (3)으로부터 (4)가 따라나올 수 없다
; ‘A와 B가 같은 사람임’과 ‘B와 C가 같은 물질덩이임’을 통해 어떠한 결론도 따라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동일성 관계가 종류 상대적이어야 한다 혹은 절대적이어야 한다를 결정짓는 작업을 하지는 않겠지만, 덧붙여 상대적 동일성과 절대적 동일성간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그 차이를 바탕으로 두 입장 중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이라는 판단이 드는지 생각해 보자

‘철수는 영수의 왼손잡이 형제이다(e)’와 ‘철수는 영수보다 더 좋은 가수이다(f)’를 보자
; (e)와 (f)는 통사적으로 같은 문장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의미론적으로는 두 문장이 형식상의 차이를 보이는 것 같다
; (e)는 더 분석될 수 있는 복합 문장으로 보인다
;’철수는 영수의 형제이다 그리고 철수는 왼손잡이이다’로 분석될 수 있다
; (f)가 (e)와 같은 의미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f)는 ‘철수는 영수보다 더 좋다 그리고 철수는 가수이다’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f)가 그렇게 분석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 (e)와 (f)에는 어떤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 ‘왼손잡이 형제’와 ‘더 좋은 가수’를 비교해 보자
; ‘왼손잡이 형제이다’는 ‘왼손잡이’와 ‘형제’라는 주어에 별도로 성립하는 속성을 합성한 것이다
; 반면 ‘더 좋은 가수이다’는 ‘더 좋다’와 ‘가수이다’는 별도로 성립하고 그것을 합성한 것이라 보기 힘들다
; ‘철수가 영수보다 더 좋다’는 그 자체로 유의미한 진술이 될 수 없다, 불완전한 진술이다
; 이 진술이 유의미한 진술로 이해된다면 ‘철수는 영수보다 더 좋은 사람이다’라는 이해를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 또한 ‘철수는 영수보다 더 좋은 가수이다’로부터 ‘철수는 영수보다 더 좋은 사람이다’가 따라나오지 않는다
; 이처럼 ‘좋다’라는 술어는 주어에 붙어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기보다는 F가 어떤 종류를 의미할 때 ‘좋은 F이다’를 의미한다
; 술어 ‘좋다’는 종류에 상대적으로 붙어서 좋음의 기준이 종류에 상대적으로 주어지는 것 같다
; 그때에만 ‘좋다’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 같다
; ‘좋은 가수다’는 ‘좋다’와 ‘가수이다’가 별도로 성립하고 합성된 것이 아니라 ‘가수에 있어서 좋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따라서 (f)는 ‘철수는 영수보다 더 좋다 그리고 철수는 가수이다’로 분석될 수 없다
; (e)와 (f)는 구문론적으로 보면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의미론적으로 보면 다른 형식의 문장이다

‘동구와 서구는 같은 개이다(d)’를 다시 보자
; 절대적 동일성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상대적 동일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문장 형식을 서로 다르게 이해할 것이다
; 절대적 동일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문장을 (e)와 유사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 즉 ‘동구는 개이다, 서구는 개이다, 그리고 동구와 서구는 같다’로 분석할 것이다
; 이 분석에 따르면 동구는 개이고 서구가 개인 점에서는 종류 의존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종류를 통해 개체를 개별화한다
; 한편 그렇게 개별화된 개체에 대해 동일성이 성립하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절대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 반면 상대적 동일성을 받아들이는 기치의 경우 (d)의 문장 형식을 (f)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할 것이다
; 즉 ‘같은 개이다’는 ‘같음’과 ‘개’로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 ‘같은 개임’라는 관계가 동구와 서구 사이에 성립한다고 이해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a와 b는 같지 않다’라는 진술도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 절대적 동일성을 받아들이는 경우 ”a와 b는 같다’가 아니다’로 이해할 것이다
; 상대적 동일성을 받아들이는 경우 ‘a와 b는 같은 사람이 아니고, 같은 개가 아니고, …’와 같이 이해할 것이다

상대적 동일성을 받아들일 더 강력한 이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상대적 동일성을 통해 퍼즐을 해결하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
; 많은 사람들이 동일성 관계는 종류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적 동일성은 너무 급진적으로 동일성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꾸는 것을 요구한다
; 상대적 동일성이 대중적인 견해는 아니다
; 프레게는 대상의 개별화는 종류 상대적임을 명시적으로 이야기하면서도 동일성 관계는 절대적인 것으로 가정하는데, 그만큼 동일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반 인와겐의 ‘임의로 떼어낸 부분 교설’ 부정
; 부분 변화의 퍼즐은 기본적으로 다음의 두 생각에서부터 출발했다
; 1) 데카르트는 지속하는 대상이다, 2) 데카르트-마이너스는 지속하는 대상이다
; 그런데 사고 이전의 데카르트-마이너스, 즉 사고 이전에 데카르트에서 그의 왼손만을 제외한 그 부분이 정말 있는 것인가?
; 반 인와겐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그렇다면 퍼즐은 애초부터 발생하지도 않는다

반 인와겐은 양보적으로 데카르트-마이너스가 어떤 의미에서 존재한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 데카르트-마이너스가 있는 대상이라 한다면 그것은 추상적인 대상이다
; 데카르트-마이너스는 왼손이 있는 데카르트에 있어 그 왼손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만을 고려한 것이다
; 이는 우리의 추상화 작용을 통해 상정해 본 대상이므로 그런 대상이 있다면 추상적 대상일 것이다
; 물론 데카르트는 구체적 대상이므로 데카르트-마이너스는 데카르트와 어떤 의미에서도 동일한 대상일 수는 없다

; 한 대상이 있으면 그 대상에서 임의로 구획한 것을 생각해 보자
; 각각의 구획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대상이 있다고 하는 그 주장을 ‘임의로 떼어낸 부분 교설’이라 한다
; 다시 말해 ‘임의의 대상 x에 대해, x를 임의로 구획한 것에 해당하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부분들이 존재한다’라는 주장이다
; 부분 변화의 퍼즐은 이 주장에 의존하고 있고, 이 주장은 틀렸다
; 그렇다면 이때 어떻게 구획된 것이 임의적으로 구획된 것이고, 어떻게 구획된 것이 임의적이지 않은 것인가?
; 우리 몸이 진부분을 가지지 않는 기본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기본 입자들은 존재하는 진짜 부분들이다
; 그런 기본 입자들은 임의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구획된 것이기 때문이다
; 그 외의 구획에 있어서는 상응하는 구체적인 대상이 없다

반 인와겐이 단지 이 퍼즐에 대한 대응을 하기 위해 임의로 떼어낸 부분 교설을 거부할 뿐이라면 이런 대응은 임시방편적 대응이 될 것이다
; 반 인와겐은 퍼즐에 대응이 된다는 점 이외에 데카르트-마이너스라는 하나의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독립적인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실제로 반 인와겐은 이 퍼즐과 독립적으로 데카르트-마이너스라는 대상의 존재를 부정할 근거를 가지고 있다
; SCQ(special composition question)
; 우리는 흔히 일상적 개체에 대해 여러 부분들이 모여 하나의 대상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여러 대상들이 있을 때 그 대상들이 하나의 대상을 구성하고 있는 경우가 있고, 하나의 대상을 구성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있다
; 여러 대상들이 하나의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 성립할 조건이 무엇인가? 어떤 경우 여러 대상들이 하나의 대상을 구성하고 있겠는가?
; 가령, 컵의 부분끼리는 컵을 구성하지만 컵의 부분과 나의 머리카락이 하나의 대상을 구성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 The xs compose y iff … 에서 ‘…’에 해당하는 필요충분 조건이 무엇인가?
cf. general composition question은 여러 대상들이 하나의 대상을 구성할 때 그 구성관계에 대한 분석이다

; SCQ에 대한 상식적 답변은 어떤 경우에는 여러 대상들이 하나의 대상을 구성하고, 다른 어떤 경우에는 여러 대상들이 하나의 대상을 구성하지 못한다는 생각 하에 있다, 그런 구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 SCQ에 대한 비상식적 답변은 모든 경우에 여러 대상들이 하나의 대상을 구성하거나 혹은 구성하지 않는다는 생각 하에 있다
; 상식적 답변의 노선에서의 SCQ에 대한 답변을 생각해 보자
; 여러 대상들이 서로 접촉하고 있을 때 하나의 대상을 구성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만족스럽지 않다)
; 단지 접촉뿐 아니라 여러 대상들이 함께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또한 만족스럽지 않다)
; 반 인와겐은 우리의 상식적인 경우들을 모두 담아낼 답변은 없다고 생각한다
; 구성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컵은 부분을 가지고 있어서 컵의 부분들은 컵을 구성한다)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능한 비상식적 답변으로는,
; 1) 구성은 어떤 조건에서도 성립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기본 입자들이다, 나머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구성적 허무론, compositional nihilism)
; 2) 구성은 모든 조건에서 성립한다, 컵과 나의 머리카락이 구성하고 있는 대상도 있다 (구성적 보편론, compositional universalism)
; 3) 구성체는 유기체인 경우에만 존재한다, 이 세상에는 구성체 아닌 기본 입자와 유기체만 존재한다, 책상이나 컵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기체는 그것이 가지는 생명활동을 통해 존재할 수 있다 (유기체론, 반 인와겐)
; SCQ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변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반 인와겐의 답변은 생각보다 설득력 있을 수 있다
; 반 인와겐은 부분 변화의 퍼즐을 고려하는 맥락과 독립적으로 구성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고려를 통해 그 중 유기체론이 참이라는 독립적인 논증을 가지고 있다
; 그 논증에 따른다면 데카르트-마이너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 반 인와겐에 따르면 이 퍼즐은 애초에 구성체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성립하는 것일 뿐이다
; 그러나 반 인와겐의 대응은 구성체에 대한 그의 견해에 입각해 있는데, 구성체에 대한 반 인와겐의 견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수용되는 견해는 아니다
; 구성에 대한 특정한 견해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부분 변화의 퍼즐에 답할 수 있다면 내속이론가는 그것을 더 선호할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내속이론의 관점에서 부분 변화의 퍼즐에의 답변 가능성
(1) 치좀의 부분전체론적 본질주의
(2) 기치의 상대적 동일성
(3) 반 인와겐의 임의로 떼어낸 부분 교설 부정
; 세 대응 모두 급진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 치좀은 부분의 변화를 통해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거부하고, 기치의 견해는 동일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급진적으로 바꾸기를 요구하고, 반 인와겐의 견해는 구성에 대한 특정한 견해에 입각해서만 퍼즐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들에 입각하지 않고서도 퍼즐에 대한 답변을 제공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 다음으로는 좀 더 대중적인 내속이론적 대응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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