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철학] 콰인의 분석/종합 구분 비판과 인식론적 전체론

본 [언어철학] 항목은 교수님께 동의를 얻고 2020년 1학기 서울대학교 ‘언어철학’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내용 흐름은 수업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핸드아웃을 최대한 풀어 쓰려 노력했다. 본 글에는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며, 그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사전 문의 없이 무단으로 복제, 배포하는 행위는 금한다.


「Two Dogmas of Empiricism」에서 콰인은 논리실증주의의 두 독단을 지적한다.
첫 번째 독단은 참인 진술이 분석적으로 참인 진술과 종합적으로 참인 진술들로 구분된다는 주장이며,
두 번째 독단은 유의미한 종합진술 각각은 직접적 경험을 가리키는 표현들만으로 이루어진 진술들로 논리적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콰인은 논리실증주의의 환원주의적 검증주의 의미론을 지적하지만, 사실 그의 공격은 이를 넘어 의미 그 자체에 대한 회의주의를 함축한다.

먼저, 콰인은 분석/종합 구분에 대해 분석성 개념은 어떠한 적절한 설명도 제시된 적 없는 개념이라 지적한다.

칸트의 분석성 개념에 대한 정의
; 분석적으로 참인 진술은 주어에 이미 개념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 이상을 주어에 귀속하지 않는 진술이다.
; ex. ‘모든 총각은 남자다.’ ; 주어 ‘총각’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 이상을 술어 ‘남자’가 가지고 있지 않다.

콰인의 비판
(1) ‘어떤 개념이 다른 개념에 포함되어 있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이 ‘개념적 포함’이 어떤 조건에서 성립하는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2) 위 정의는 주술 구조로 되어 있는 문장에만 적용될 수 있다. ex. ‘비가 오거나 또는 비가 오지 않는다.’는 분석적으로 참이지만, 이 문장이 분석적으로 참인 것은 문장의 술어가 이 문장의 주어에 개념적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칸트의 두 번째 정의
; 분석적으로 참인 진술은 그 진술을 부정할 경우 자체 모순이 야기되는 진술이다.
; ex. ‘모든 총각이 남자가 아니다.’ 이 문장은 자체 모순을 야기시킨다.

콰인의 비판
; 어떤 문장이 자체 모순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자체 모순’이라는 개념 역시 불명료하다.

프레게의 분석성 정의
; 분석적으로 참인 진술 = 논리법칙이거나(논리적 참) / 정의들만을 전제로 가지고 논리법칙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진술

ex.
총각: 결혼하지 않은 남자 (정의)
모든 총각은 남자다 > 모든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남자다 > (∀x)((Mx&-Gx) → Mx); 논리법칙(이런 논리적 형식을 가진 어떤 문장도 참
∴ 이 문장은 정의만을 전제하여 논리법칙으로부터 도출되는 진술이기 때문에 분석적으로 참이다.

콰인의 비판
; 분석적 참을 도출하기 위한 정의는 올바른 정의여야 한다. 그러나 ‘올바른 정의’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분석성 개념이 필요하다.
; 정의 D가 올바르다 = D에서의 피정의항과 정의항이 동의어이다 > 표현 ‘F’와 ‘G’가 동의어이다 = ‘F’와 ‘G’가 필연적으로 진리치 변화 없이 상호 대치 가능하다 > ‘필연적으로 P이다’가 참이다 = 진술 P가 분석적이다
; 이때 표현 ‘F’와 ‘G’가 동의어이기 위해 ‘F’와 ‘G’가 진리치 변화 없이 상호 대치 가능할 뿐아니라 그것이 필연적이어야 한다. 외연은 동일하지만 의미가 다른 두 표현 ‘F’와 ‘G’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심장을 가진다’와 ‘콩팥을 가진다’와 같이, 우리 세계에서는 외연이 동일할지라도 의미가 다른 두 표현이 있기 때문에 진리치 변화 없이 상호 대치 가능하다는 설명은 너무 약한 개념이다. 따라서 어떠한 가능세계에도 두 표현을 상호 대치하였을 때 진리치가 동일하다는 ‘필연적으로’가 추가되어야 한다.
; 그런데 이때 논리실증주의에게 필연성 개념이란 분석성 개념과 같다. 논리실증주의는 선험성, 필연성 개념을 분석성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분석성 개념에 대한 프레게의 정의는 순환적이다.

이러한 콰인의 비판은 오늘날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콰인은 “모든 각각의 개념에 대해 그 개념이 명시적인 비순환적 정의를 허용하지 않으면 그 개념은 이해가능한 것이 아니다”라는 소크라테스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 소크라테스적 전제는 너무나 강한 요구사항이다. 우리는 ‘빨갛다’, ‘오른쪽’ 등의 개념에 대해 비순환적 정의를 줄 수 없음에도 이러한 개념을 포함하는 진술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 소크라테스적 전제는 원리적으로도 문제를 가진다. 어떤 언어가 자신의 표현들 각각에 대해 명시적인 비순환적 정의를 줄 수 있으려면 그 언어는 무한히 많은 기본 표현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언어는 우리가 배울 수 없는 언어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콰인은 소크라테스적 전제를 약화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개념들에 대해서는 그 개념이 명시적인 비순환적 정의를 허용하지 않으면 그 개념은 이해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때 콰인은 하필 왜 분석성 개념이 약한 형태의 소크라테스적 전제를 만족시키는 개념에 포함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떤 진술이 분석적인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때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라 답할 수 있다.

그러나 분석성 개념이 문제 있는 개념임을 보이기 위해서는 그 개념을 적용할 때 가끔씩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보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개념들은 모호한(vague) 개념들로, 해당 개념들을 적용할 때 가끔씩은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가령 ‘대머리’ 개념은 불분명한 경우가 있어 개념을 적용할 때 어려움을 겪지만 그렇다고 ‘대머리’ 개념이 이해 불가능한 개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콰인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분석성 개념의 적용이 일반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분석성 개념이 잘 적용되는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고, 적용에 어려움이 있는 경우에도 그 어려움이 분석성 개념으로 인해 발생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가령 콰인은 “문장 ‘초록색인 모든 것은 연장되어 있다’는 분석적이다”의 참거짓을 판단할 때 어려움이 발생한다고 지적했지만, 분석성 개념을 뺀 문장 “문장 ‘초록색인 모든 것은 연장되어 있다’는 참이다”의 참거짓 역시 판단하기 어려우므로 이때 어려움은 분석성 개념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에이어의 검증주의 의미이론에서 분석성 개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S가 분석적이다 = S가 논리적 참과 동의적이다 = S가 논리적으로 참인 문장과 같은 검증 방법을 가지고 있다 = S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험에 의해 검증된다 = S는 어떠한 경우에도 경험에 의해 반증되지 않는다
; 이러한 정의는 각 문장이 언어적 요소와 사실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분석적 문장은 사실적 요소가 전혀 없기에 경험으로 반증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기초한다.

콰인은 경험에 의해 반증될 수 없는 문장은 없다고 주장한다. 보다 정확히는 “어떠한 문장이 있을 때, 각 문장에 대응되어 그 문장이 환원될 수 있는 경험들에 의해 문장이 검증된다”는 환원주의적 검증주의 의미이론을 지적한다.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문장 S를 검증할 수 있는 대응되는 고유한 검증 경험이 존재하고 이때 검증의 단위는 개별 문장과 개별 경험이지만, 콰인은 경험적 증거와 문장의 진리치 간의 관계는 미결정적이라고 지적한다.
; 어떠한 이론에 속한 어떠한 진술에 대해서도 그 진술을 확정적으로 검증하거나 확정적으로 반증하는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은 본질적으로 경험에 의해 미결정된다(경험에 의한 이론 미결정성).
; 경험에 의한 이론의 검증 혹은 반증의 단위는 특정 이론에 속한 하나의 개별 문장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 이론들 전체에 속한 문장들 전체의 집합이다(인식론적 전체론). 따라서 우리는 원칙적으로 어떠한 이론의 어떠한 진술도 포기할 수 있고 이때 포기는 실용적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다.
어떠한 경우에도 경험에 의해 반증되지 않는 진술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석적 진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론적 전체론
; 전체 믿음들은 세계에 대해 복잡한 그물망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때 그물망의 믿음들은 모두 같은 위치에 있지 않고, 우리 이론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여 잘 바꾸지 않는 믿음인 핵심에 있는 믿음이 있고, 비교적 쉽게 바꾸는 이론 체계 주변부에 있는 믿음이 있다.
; 우리는 어떤 믿음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관찰증거가 있어도 그 믿음이 이론 체계의 핵심에 있는지 주변부에 있는지에 따라 다르게 판단한다.
; “빛보다 빠른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현대 물리학의 핵심적 믿음 B가 있다.
; “유럽물리연구소(CERN)에서 발사된 뉴트리노(중성미자) 입자가 730km 떨어진 이태리 중부의 국립핵물리학연구소(INFN)에 도달한 시간을 측정해보니, 뉴트리노(중성미자) 입자의 속도가 빛보다 60.7나노초(=607억분의 1초) 빠르게 측정되었다.”라는 관찰증거 E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 이 당시 99% 이상의 물리학자들은 관찰증거 E에서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믿으며 믿음 B를 폐기하지 않았다.
; 믿음 B에 반하는 관찰증거 E가 발견되었음에도 보조믿음 B1(측정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다)을 도입함으로써 믿음 B를 유지한 사례이다.
=> 우리는 경험적 진술이라 하는 것들도 그것이 이론적 체계의 아주 핵심에 있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이를 유지하려 할 수 있다. 반대로, 소위 분석진술이라 하는 것들도 사실 우리 이론체계의 설명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포기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양자역학을 받아들이기 위해 배중률을 포기할 수도 있다.

전자, 자연수, 신이라는 세 종류의 존재자에 대해
; 논리실증주의는 세 존재자들을 뚜렷하게 구분한다. 전자는 경험적으로 검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존재자이고, 자연수는 의미에 의해 참인 수학 진술에서 가정하므로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존재자이며, 신은 무의미한 형이상학의 진술에서 가정하므로 무의미한 존재자이다.
; 반면 콰인에게 세 존재자들은 모두 세계에 대한 경험적 이론에서 가정하는 존재자들이다. 세 존재자들은 모두 경험에 의해 입증되거나 반증된다. 전자가 있다고 믿는 것과 자연수가 있다고 믿는 것은 본질적 차이가 없다. 콰인이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신이 무의미한 존재자여서가 아니라, 신을 믿는다 하더라도 전체 이론의 설명력이 증대되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 존재자들 간에 인식론적 지위의 차이는 없다.


콰인은 분석/종합의 구분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논리학과 수학/경험과학의 날카로운 구분을, 과학/형이상학의 구분을, 철학/과학의 엄격한 구분을 거부한다. 콰인은 철학 또한 경험적 탐구가 가능한 일종의 과학이라 생각하여, 철학의 핵심 과제는 인식론적 질문이라고 보았다.
; 전통적 경험주의 인식론에서는 “세계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어떻게 정당화되는가”를 물었다면, 콰인은 철학이 “우리 두뇌 신경세포들의 전기적, 생화학적 자극들로부터 어떻게 세계에 대한 이론이 산출되는가”를 탐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콰인이 생각하는 철학의 인식론적 자ㄱ업은 행동주의 과학, 발달심리학과 같았다.
; 콰인은 과학과 철학의 엄격한 경계를 무너뜨리며 “자연화된 인식론(Naturalized Epistemology)”을 만들었다. 과학이론을 정당화해 주는 제1철학을 찾는 대신 철학적 작업이 과학적 작업과 연속된다는 생각 하에 과학적 작업의 결과물을 받아들이고 이로부터 전통적 철학의 문제를 과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자 했다.
; 콰인에 대해서는 고전적 구분인 발견의 작업과 정당화의 작업 중 정당화의 작업(규범적 작업)을 포기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