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언어철학] 항목은 교수님께 동의를 얻고 2020년 1학기 서울대학교 ‘언어철학’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내용 흐름은 수업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핸드아웃을 최대한 풀어 쓰려 노력했다. 본 글에는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며, 그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사전 문의 없이 무단으로 복제, 배포하는 행위는 금한다.
크립키는 기술주의 이름 이론 또는 이름에 대한 기술주의 이론을 비판한다(크립키가 붙인 이름으로 러셀의 기술이론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기술주의 이름 이론
; 이름의 뜻은 그 이름의 지시체를 결정해줄 수 있는 어떤 단일한 한정기술구, 혹은 한정기술구들 다발에 의해 주어진다.
; 크립키는 프레게의 이론(이름의 뜻이 단일한 한정기술구로 주어진다), 러셀의 이론을(러셀은 지시체만을 받아들이고 뜻 개념을 없앴으나 이름이 위장된 한정기술구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기술주의 이름 이론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프레게와 러셀의 단일 기술구 기술주의 이론을 변형시켜 설과 스트로슨은 다발 기술구 기술주의 이론을 제시했다.
크립키의 기술주의 이름 이론 비판 (1): 양상 논증(Modal Argument)
; 이름 N의 뜻이 한정기술구 DD에 의해 주어진다고 할 때, N과 DD의 의미가 동일하므로 동일성 문장 ‘N=DD’는 분석적으로 참이다. 모든 분석적 참은 필연적으로 참이므로, ‘N=DD’는 필연적으로 참이어야 한다. 즉 양상 진술 ‘It is necessary that N=DD’가 참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참이 아니다. 이름 N의 뜻은 한정기술구 DD에 의해 주어질 수 없다.
; 크립키는 고정지시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양상 진술 ‘It is necessary that N=DD’가 참이 아님을 밝힌다. 고정지시어(rigid designator)란 모든 가능세계들에서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크립키에 따르면 이름은 고정지시어이지만 한정기술구는 고정지시어가 아니다. 따라서 두 이름으로 이루어진 동일성 문장 ‘N1=N2’는 참일 경우 반드시 필연적으로 참이다. 반면 이름과 한정기술구 혹은 두 한정기술구로 이루어진 동일성 문장 ‘N=DD’나 ‘DD1=DD2’는 참일 경우 오직 우연적으로만 참이다.
크립키의 비판에 대한 가능한 답변
; 이 답변은 크립키 자신이 얘기한 것이다.
; 기술주의 이름 이론을 ‘이름 N과 연계된 한정기술구 DD가 N의 뜻을 제공하고 이 뜻이 N의 지시체를 결정한다’라는 의미 이론으로서 이해하는 대신, ‘이름 N과 연계된 한정기술구 DD는 N의 지시체를 결정하지만 N의 뜻을 제공하지는 않는다’라는 지시체 결정 이론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기술주의 이름 이론을 보다 약한 형태로 받아들임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다.
;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N=DD’ 형태의 동일성 문장은 DD가 N의 뜻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분석적으로 참일 필요가 없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참일 필요도 없다.
크립키의 기술주의 이름 이론 비판 (2): 의미론적 논증(Semantic Argument)
; 그러나 크립키는 이어서 한정기술구는 이름의 지시체를 결정해주는 역할마저 할 수 없음을 보인다.
; 먼저 크립키는 무지로부터의 논증을 통해 이름 N과 연계된 한정기술구 DD가 어떤 대상에 의해 유일하게 만족된다는 사실이 N이 그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에 대한 필요조건이 될 수 없음을 보인다. 이름 N과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어떤 유일한 대상 a를 가리키는 한정기술구 DD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N은 여전히 a를 지칭할 수 있다. 가령, 이름 ‘Feynman’은 한정기술구 ‘the American physicist who received a Nobel Prize in physics in 1965’가 가리키는 대상을 지칭하지만, 꼭 이러한 한정기술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파인만을 가리킬 수 있다. 즉, 우리가 어떤 이름을 사용해 그 이름이 어떤 대상을 성공적으로 가리킬 때 그 가리키는 대상을 특정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담고 있는 한정기술구를 연계시킬 필요는 없는 것 같다.
; 이어서 크립키는 오류로부터의 논증을 통해 이름 N과 연계된 한정기술구 DD가 어떤 대상에 의해 유일하게 만족된다는 사실이 N이 그 대상을 지칭한다는 것에 대한 충분조건이 될 수 없음을 보인다. 이름 N에 연계된 한정기술구가 대상 a와 다른 어떤 대상 a*에 의해 유일하게 만족되면서도 N이 여전히 대상 a를 지칭할 수 있다. 가령, 우리는 한정기술구 ‘산수에 대한 불완전성 정리의 저자’가 이름 ‘괴델’과 연계된 한정기술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한정기술구는 이름 ‘슈미트’와 연계된 것이라고 해 보자. 이때 산수에 대한 불완전성 정리를 만든 것은 실제로 슈미트이며 그 저자가 괴델이라는 것은 우리의 오류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괴델은 위대한 논리학자이다’라고 말했을 때 이름 ‘괴델’은 슈미트가 아니라 여전히 괴델을 가리킨다. 즉, 이름 N에 연계된 한정기술구 DD가 대상 a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담고 있으면서도 N은 여전히 대상 a를 지칭할 수 있다.
크립키는 이름에 대한 대안적 이론으로 인과적 지칭 이론(Causal Theory of Reference)을 제시한다.
; 언어공동체 L에 속해 있는 화자 S가 이름 N을 사용하여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가는, 화자 S로부터 궁극적으로는 이른바 ‘최초의 명명식(initial baptism)’을 통해 이름 N의 지시체가 된 대상 a에게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의사소통을 통한 이름 N의 전달과 확산 과정이라는 객관적인 인과적 연쇄 고리에 의해 결정된다.
; 이에 따르면 이름 N을 사용하는 화자가 비록 N이 지칭하는 대상 a만이 유일하게 만족하는 한정기술구를 알고 있지 못하더라도, 화자가 언어공동체 L의 한 성원이고, 언어공동체 L과 이름 N의 지시체 a 사이에 인과적 연쇄 고리가 존재하고, 언어공동체 L에서 이름 N이 사용되고 있는 언어 표현이라면, 화자는 이름 N을 사용하여 성공적으로 a를 지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