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다발이론 반대 논증 1

본 [형이상학] 항목은 교수님께 동의를 얻고 2021년 1학기 서울대학교 ‘형이상학’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내용 흐름은 수업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핸드아웃을 최대한 풀어 쓰려 노력했다. 본 글에는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며, 그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사전 문의 없이 무단으로 복제, 배포하는 행위는 금한다.


다발이론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두 가지 반대 논증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글에서는 먼저 첫 번째 반대 논증을 살핀다
; 우리는 개체 ‘공이’에 대해 ‘공이는 빨갛다’와 ‘공이는 둥글다’가 모두 참임을 받아들인다
; 개체 ‘공이’를 그것의 속성들을 통해 정의되는 구성체로 이해한다면, 두 문장이 참이라는 직관과 충돌이 발생하는 것 같다
; 정확히 이러한 충돌이 어떤 방식으로 정식화될 수 있는지 두 방식을 통해 이해해 보자

첫째,
; 다발이론에 따르면 공이는 그것이 가지는 속성들의 다발로 정의된다
; 공이와 그 속성간의 관계는 a, b, c를 원소로 가지는 집합과 그 원소들간의 관계와 유사하다
; a, b, c를 원소로 가지는 집합은 a, b, c를 통해 정의되고 마찬가지로 공이는 그것이 가지는 빨감, 둥긂 등의 속성을 통해 정의된다
; 우리가 ‘공이는 빨갛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다발이론에 따라 ‘공이를 구성하고 있는 성분 가운데 빨강이 있다’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
; 그렇다면 문장 ‘공이는 빨갛다’는 빨감, 둥긂 등의 속성들을 구성성분으로 가짐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정의되는 존재자가, 빨강을 구성성분으로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우리는 ‘공이는 빨갛다’를 발화할 때 ‘공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서 공이를 지시하고 공이에 관해 말하자면 공이가 빨갛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 이것은 동어반복적인 것으로 들린다
; 우리가 ‘공이는 빨갛다’라고 말할 때 이러한 동어반복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일상적 직관이 있지만, 이 문장을 다발이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동어반복적인 주장이 되는 것 같다

논증으로 구성해 보자
(1) 다발이론이 참이면, 공이는 빨강, 둥긂, … 을 본질적 요소로 가지는 대상이다(빨강, 둥긂, .. 을 구성성분으로 가지고 있어서 그것에 의해 정의되는 대상이다)
(2) 따라서 다발이론이 참이면, ‘공이는 빨갛다’를 발화할 때 우리는 ‘공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빨강, 둥긂, … 을 본질적 요소로 가지는 대상을 지시한다
(3) 우리가 ‘공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빨강, 둥긂, … 을 본질적 요소로 가지는 대상을 지시한다면, 우리는 이미 공이가 빨강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
(4) 따라서 다발이론이 참이면, ‘공이는 빨갛다’를 발화할 때 우리는 동어반복적 주장을 하는 것이다
(5) 하지만 ‘공이는 빨갛다’를 발화할 때 우리는 동어반복적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6) 따라서 다발이론은 거짓이다

가능한 대응
; 우리가 어떤 개체를 지시하거나 이름을 사용해서 개체에 대해 말할 때, 개체에 대한 지시가 성립하기 위해 그 개체를 구성하는 모든 본질적인 요소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 가령 우리가 물에 대해 말하기 위해 물을 구성하는 모든 본질적인 요소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 이처럼 개체를 지시하기 위해 그 개체의 본질적인 요소를 모두 알아야 한다면 우리의 이름 사용이 성공하지 못하는 수없이 많은 사례가 있을 것이다
; 어떤 개체에 대한 지시가 성립하게 만드는 것은, 그 개체의 본질적인 요소를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적 노력을 통해 본질적인 요소들을 모두 파악하는 것과 독립적으로 우리와 개체 사이에 성립하는 다른 객관적인 관계(가령 인과관계, 대면관계)의 성립일 수 있다
; 그렇다면 우리는 개체의 본질적 요소들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객관적 관계를 통해 개체를 지시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처럼 위의 다발이론 반대 논증은 어떤 개체에 대한 지시가 성립하는 조건에 있어, 지나치게 인식 주체의 인식적 능력에 의해 지시관계가 성립한다는 가정을 하고 있는 것 같다
; 강력한 반대논증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진술 ‘공이는 빨갛다’나 ‘공이는 둥글다’에서 ‘공이’라는 이름이 지시하는 존재자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의 다발로 정의되는 존재자로 이해한다면, 여전히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주장할 때 생각하고 있는 것과 충돌하지 않는가 하는 우려가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둘째,
; 다발이론이 참이라고 가정하면, 공이라는 개체가 어떤 속성을 가질 때 그 속성을 가짐은 필연적인 사실이 된다
; a, b, c를 원소로 가지는 집합은 a를 원소로 가진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참인 것처럼, 공이가 빨강, 둥긂, … 등의 속성들의 다발로 정의되는 존재자로 이해되는 한 진술 ‘공이는 빨갛다’는 필연적인 진술이 된다
; 공이는 부분적으로 빨강을 통해 정의되는 존재자이므로 빨강을 구성성분으로 가지는 것은 공이에게 본질적인 성질이 되는 것이다
; 따라서 공이는 필연적으로 빨강을 가지게 된다
; ‘공이는 빨갛다’가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참이 된다 (다발이론이 가지는 함축)
; 그러나 우리가 ‘공이는 빨갛다’를 참으로 간주할 때 그것이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공이는 빨갛다’와 같은 진술에 대해 그것이 현실적으로 참인가의 여부에 있어서는 다발이론이 우리의 일상적 직관과 맞아떨어지지만, 진술의 양상적 지위와 관련해서는 다발이론이 우리의 일상적 직관과 충돌한다
; 개체에 대해 다발이론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개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인 것 같다
; 일상적으로 개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 가운데 많은 것들은 개체가 우연적인 것으로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개체를 속성들의 다발로 이해하면 그 속성들이 그 개체에 필연적인 속성이 되는 것 같다

논증으로 구성해 보자
(1) 다발이론이 참이면, 공이는 빨강, 둥긂, … 을 본질적 요소로 가지는 대상이다
(2*) 따라서 다발이론이 참이면, 공이는 필연적으로 빨갛고, 둥글고, … 등등이다
(3*) 하지만 공이는 빨갛지 않을 수 있었다(공이가 빨갛지 않은 것은 가능하다)
(4*) 따라서 다발이론은 거짓이다
;
(3*)에서 공이가 빨갛지 않은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이론에 입각한 진술이 아니라, 선-이론적으로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하는지 고려한 진술이다

; 다발이론에 따르면 공이가 빨갛지 않다고 한다면 그때 우리는 다른 대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충돌이 발생한다
; 다발이론가들은 공이가 빨갛다는 것이 필연적임은 다발이론의 귀결이며, 공이가 빨갛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일상적인 직관은 엄밀히 따졌을 때 거짓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 이론적 동기를 바탕으로 일상적 직관을 수정해 볼 수 있겠다
;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각 개체에게 성립하는 모든 사실은 사실 모두 필연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어떤 개체 개념은 그 개체에게 성립하는 모든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다
; 라이프니츠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2*)는 참, (3*)는 거짓이 될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견해에 따르면,
;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 된다,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우리가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려다 건너지 않는 상황을 상상할 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시저와 유사하지만 시저 자체는 아닌, 시저에 상응하여 시저인 것처럼 우리에게 간주되는 다른 대상(시저의 상대역)이다
; 한 개체는 한 가능세계에만 있다
( ; 유다가 은 30냥에 예수를 팔아넘긴 것이 필연적으로 참이 된다. 그렇다면 유다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

; 우리가 시저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모든 존재론적 입장을 받아들인다고 했을 때 – 엄밀히 말해 시저 자신이 아니라 시저의 상대역이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은 가능세계를 상상했을 때 – 그로부터 시저는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따라나오는가?
; 따라나온다고 했을 때 그러한 추론은 한 가지 가정에 입각해 있다
; 우리가 어떤 개체에 대해 말할 때 ‘그 개체가 ~했을 가능성이 있다’가 의미하는 바가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한 가지 견해를 가정하고 있다
; a가 F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a 자신이 F인 그런 가능세계가 있다는 것을 통해 분석되고 있다
; 그런데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a 자신이 실제로 F가 아닌데 F를 가지는 그런 가능세계는 있을 수 없다
; 그렇기 때문에 a가 F이면 필연적으로 a가 F이다
; 즉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시저 자신이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 가능세계가 있다는 것을 통해 분석되는데,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시저가 실제로 루비콘 강을 건넜는데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 그런 가능세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시저는 필연적으로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다

; 그런데 어떤 사람은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적 틀은 모두 받아들이면서도(우리가 a가 F인 것을 상상할 때 실제로 상상하는 것은 a의 상대역이 F인 가능세계이며, a 자신이 실제로 F가 아닌데 F를 가지는 가능세계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a가 F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사실 a 자신이 F인 어떤 가능세계를 통해 분석되는 것이 아니고, a의 상대역이 F인 그런 가능세계를 통해 분석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 그렇다면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을 가능성에 있어, 시저 자신이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을 가능세계는 없지만 그럼에도 시저의 상대역이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을 가능세계가 있다는 사실 덕분에,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 참이라고 말할 여지가 생긴다

대상적 가능성(대상에 관한 가능성, de re possibility)에 대한 의미론
; 대성적 가능성에 대한 의미론을 라이프니츠식으로 이해한다면, ‘a가 F이었을 수 있다’ iff ‘a가 F인 가능세계가 있다(there is a possible world at which a is F)’로 분석된다 > (TI, transworld identity)
; 즉 a 자신이 여러 다른 가능세계들에서 어떠한지에 따라서 a의 대상적 가능성이 결정된다
; 그런데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적 틀을 유지하면서 대상적 가능성에 대한 의미론을 CT(counterpart theory)와 같이 삼을 수 있다
; ‘a는 F이었을 수 있다’라는 a의 대상적 가능성을 ‘a의 상대역이 F인 가능세계가 있다(there is a possible world at which the counterpart of a is F)’를 통해 분석할 수 있다

; CT에 따르면 시저에 관한 가능성의 참여부는 시저 자신이 가능세계들에서 어떠한지가 아니라 시저의 상대역이 다른 가능세계에서 어떠한지에 따라 결정된다
; 라이프니츠와 달리 CT를 받아들이면 두 번째 반대논증에 대해 (3*)를 여전히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 ‘공이가 빨갛지 않을 수 있었다’가 참인 조건은 공이 자신이 빨갛지 않은 가능세계가 있다는 것을 통해 분석되는 것이 아니다
; 공이의 상대역이 빨갛지 않은 가능세계가 있다면 ‘공이는 빨갛지 않을 수 있었다’가 참이 되는 것이다
; 다발이론가는 공이 자신이 빨갛지 않은 가능세계는 없다고 이야기하겠지만, 공이의 상대역이 빨갛지 않은 가능세계는 있다는 것을 수용할 수도 있다
; 그렇다면 CT를 통해 (3*)를 받아들일 수 있다, 오히려 (2*)를 거부함으로써 다발이론을 옹호할 수 있다
; (2*)는 ‘공이는 빨갛고, 둥글고, .. 등등이지 않음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지만 CT에 따르면 ‘공이는 빨갛고, 둥글고, … 등등이지 않음이 가능하다’를 받아들이게 된다, 공이가 아닌 공이의 상대역은 빨갛지 않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발이론가는 TI와 CT 두 가지 방식으로 각각 반대 논증에 대응할 수 있다


상대역 이론의 대표적 옹호자인 데이비드 루이스, 대표적 비판자인 크립키
; ‘닉슨이 선거에서 이겼을 수 있었다’
; 상대역 이론가는 이 진술의 참을 닉슨 본인이 선거에서 이기는 가능세계를 통해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닉슨의 상대역이 선거에서 이기는 가능세계가 있다는 것을 통해 분석한다
; 크립키는 우리는 닉슨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닉슨의 상대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한 해석은 논의의 대상을 바꿔버린 것이라 비판한다
; 상대역 이론가들은 그 진술은 닉슨에 관한 진술이 맞으며, 다만 그 양상진술의 참을 결정하는 사실이 닉슨이 다른 가능세계에서 어떠했는지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닉슨의 상대역이 다른 가능세계에서 어떠했는지에 대한 사실인 것이라 대응한다 (양상진술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사실은 상대역에 관한 진술이다)
; 상대역 이론에 따르면 닉슨에 대해 성립하는 어떤 가능성의 여부가 다른 가능세계에 있는 닉슨의 상대역에 대한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 우리는 그러나 분명 어떤 대상에 대한 가능성은 그 대상 자신의 본성에 의해 근거지어져야 한다는 직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