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시간과 관련된 철학적 논의에 있어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고려

본 [형이상학] 항목은 교수님께 동의를 얻고 2021년 1학기 서울대학교 ‘형이상학’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내용 흐름은 수업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핸드아웃을 최대한 풀어 쓰려 노력했다. 본 글에는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며, 그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사전 문의 없이 무단으로 복제, 배포하는 행위는 금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고려
; 선원이 등속운동하는 유람선 위에서 걷고 있다 해 보자
; 속도는 단위시간당 이동한 거리의 비율이다
; 배에 상대적으로 선원이 이동하고 있는 거리, 해저에 상대적으로 배가 이동하고 있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 선원의 이동을 배에 상대적으로 생각했을 때와 해저에 상대적으로 생각했을 때 선원의 이동 속도가 다르다
; 어떤 기준에(지시틀에) 상대적으로 단위시간당 변화하는 거리의 비율을 잴 것인지 먼저 결정해야 한다

; 어떤 것이 진짜 선원의 이동 속도인가?
; 배를 기준으로 / 해저 바닥을 기준으로 / 태양을 기준으로 / …
; 선원의 진정한 이동 속도란?

진정한 속도란 없고 본질적으로 상대적인 속도만이 있다 vs 물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속도가 있다
; 뉴턴은 물체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속도, 고유한 속도가 있다고 믿었다
; 물체의 고유한 속도, 절대속도란 어떤 물리적 대상을 지시틀로 해서 그 지시틀에 상대적인 속도가 아닌 공간 그 자체를 놓고 보았을 때 그 공간에 상대적으로 가지는 속도라고 보았다
; 뉴턴의 이러한 견해는 공간에 대한 어떤 특정한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공간은 그 자체로 있으면서, 물리적인 대상이 그것을 점유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물질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 이런 생각에 따르면 공간은 실체와 같은, 물체와 독립적인 비물질적인 존재자다
; 이런 생각은 공간에 대한 실체론(substantivalism)이라 부를 수 있다
; 비물질적인 실체로서의 공간이 주어진다면 물체의 절대속도는 객관적인 물리량으로 실재하는 속성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절대속도를 정말 실재하는 물리량이라 할 수 있을까?
; 물체가 가지고 있는 절대속도가 객관적인 물리량이라면 그것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하는데, 공간 자체가 비물질적이기에 지각될 수 없는 것이므로 절대속도는 측정될 수 없는 것이다(우리는 물질적인 것만을 지각할 수 있다)
; 공간에 대한 실체론 자체는 이해될 수 있다 하더라도 절대속도는 지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인 것 같다
; 물체가 가지고 있는 절대속도라는 물리량이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면 과학에서 상정하기에 불완전한 것 같다

물체가 절대속도를 가진다는, 공간이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증거를 가질 수 있을까?
; 뉴턴 스스로도 절대공간이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한편 뉴턴은 절대속도는 그 자체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절대가속도의 경우에는 물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뉴턴의 양동이 사고실험을 살펴보자
; 밧줄이 있어서 양동이를 묶어놓고 양동이에 반쯤 물을 채워넣는다
; 양동이와 물은 둘 다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밧줄을 꼰 후에 풀면 밧줄이 돌면서 양동이가 회전한다
; 이때 양동이가 먼저 회전하여, 어느 순간까지는 양동이만 회전하고 물은 가만히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양동이의 벽면과 물의 마찰력에 의해 양동이와 물이 함께 회전하게 된다

; 밧줄로 꼬기 이전의 처음 상태, 밧줄을 꼬아서 막 풀었을 때의 상태, 양동이와 물이 같이 회전하고 있을 때의 상태에 대해 생각해 보자
; 첫 번째 상태와 마지막 상태를 비교했을 때 양동이에 상대적으로 물이 회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앞선 두 상태와 마지막 상태에서 물리량에 있어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 마지막 상태에서는 물이 양동이와 함께 회전하면서 안쪽으로 움푹 파인다
; 물이 안쪽으로 파인다는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뉴턴 법칙에 따르면 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속도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 이때 어떤 것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속도의 변화가 있다고 해야 하는가?
; 양동이와 같이 돌고 있으므로 양동이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물에는 속도의 변화가 없다
; 뉴턴의 제안은 공간을 잡자는 것이다
; 이런 사고실험을 통해 절대공간은 물리적으로 확인가능한 어떤 것이 된다
; 절대가속도라는, 절대공간을 상대적으로 하는 양이 경험적으로 확인가능하다

; 뉴턴이 이 사고실험에서 가정하는 것은 양동이, 물, 밧줄만 존재한다는 것이지만 이를 상상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 다른 어떤 물리적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 물이 무엇에 상대적으로 속도 변화를 일으키는가와 관련해서 꼭 절대공간에 상대적으로 속도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 사고실험에서 뉴턴은 자신에 유리한 방식으로 가정하고 논증을 진행하고 있다

절대속도와 절대가속도가 진정한 물리량이려면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 절대속도와 절대가속도는 실재하는 진정한 물리량이 아닌 것 같다
; 따라서 그런 것을 상정하지 않고서 운동을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으로 나아가게 된다
; 공간에 대한 비물질적 실체로서의 이해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과학이 진행되었다

공간에 대한 실체론에 반대하는 입장: 공간에 대한 관계주의, 관계론(relationalism)
; 공간 혹은 공간적 속성은 대상이나 대상간에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해 파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실체가 아니다
; 개체 A와 B가 다른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 A가 점유하는 지역과 B가 점유하는 지역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A와 B가 서로 다른 개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 물리적인 대상은 서로 같은 공간을 점유할 수 없다는 것이 근간이 되는 개념이다
; 가령 ‘A가 B로부터 1km 떨어져 있다’는 A가 어떤 시간 동안 어떤 정도의 힘을 받으면 운동을 해서 B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근거한다고 이해될 수 있다
; 어떤 위치가 하나의 공간이 되는 것은, 어떤 대상이 그 위치에 있다는 것 혹은 그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것(양상적 사실)이다
; 공간이나 공간적 속성을 대상과 대상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혹은 양상적인 속성을 포함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공간에 대한 실체론과 공간에 대한 관계론에 있어, 절대속도를 부정하는 입장은 경험주의적 신조를 바탕으로 하는 것 같다
; 다만 공간을 실체로 보지 않고 절대속도를 부정한다고 해서 시간에 대해서도 시간이 객관적인 실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 바로 거부되는 것은 아니다
; 시간과 관련된 성질 중 어떤 객관적인 속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으로 동시성이 있을 수 있다
; 어제 비가 온 사건과 지금 맑은 사건은 동시적이지 않으며, 이는 관점의 차이라기보다는 객관적인 차이인 것 같다
; 어떤 행성이 은하계에서 폭발했을 때 그 폭발이 우리에게 관찰된다면 그 시점에서 그 행성은 이미 폭발로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것이다
; 그때 내가 어떤 행성의 폭발 정보를 습득한 사건과 그 행성이 있던 자리에 행성의 파편이 무질서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건은 동시적 사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어떤 두 사건이 동시에 발생했는지 아닌지는 상식적 수준에서 생각했을 때 객관적인 어떤 것인 것 같다
; 이런 상식적인 생각은 절대속도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절대속도에 대한 거부, 공간에 대한 실체론에 대한 거부 자체에서 시간의 동시성이 객관적인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더욱 과격하게, 시간의 동시성조차도 상대적인 것으로 상정한다
; 영희가 서 있고, A 지점과 B 지점에서 각각 빛이 발사되어 영희에게 동시에 번쩍 하는 것으로 관찰된다
; 영희에게 있어 A에서 번쩍거림과 B에서 번쩍거림은 동시에 발생한 것으로 관찰된다
; 기차에 타 있는 철수는 A 방향에서 B 방향으로 빨리 달리고 있다
; 철수에게는 B에서의 번쩍거림이 먼저 발생한 것으로 관찰될 것이다
; 이때 A에서의 번쩍거림과 B에서의 반짝거림이라는 두 사건은 동시적인 것인가, 아닌가?

동시적이다
; 정지해 있는 영희가 관찰한 것이 옳다
; 그런데 영희가 정지해 있다는 것은 절대속도를 거부한다면 오직 상대적인 것이다
; 절대공간과 같은 것을 상정하지 않는 한 영희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동시성 역시 상대적인 것이다
; 두 사건은 영희에 상대적으로는 동시적인 것이고, 철수에 상대적으로는 B 사건이 먼저 일어난 것이다
; 물론 특수 상대성 이론이 이러한 간단한 사고실험에 대한 한 가지 설명으로서 채택된 것만은 아니다
; 특수 상대성 이론은 두 가지 원리를 상정함으로써 기존의 물리 이론에서 설명하기 힘들던 부분들을 단순하게 해소해 준다
; 특수 상대성 이론의 두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예측할 수 있는 시간 지연 현상 등을 경험적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시간과 관련한 존재론과 관련해서 특수 상대성 이론이 가지는 함축이 있는 것 같다
; 특수 상대성 이론과 잘 맞아떨어지는 시간 관련 존재론은 영원론일 것 같다
; 특수 상대성 이론이 현재론과는 어떤 충돌이 있을 것 같다
; 현재론에 따르면 현재성은 객관적인 성질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그렇지 않게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 그 정확한 충돌 지점을 찾기 위해 다음과 같이 논증을 구성해 보자

(1) 현재론이 참이면, 사건/대상의 존재 여부는 그것의 현재성 여부에 달려 있다
(2) 어떤 것의 현재성 여부는 그것이 지금 시점과 동시적인가에 달려 있다
(3) 지금 시점과 동시적인가는 관성 지시틀에 상대적이다 (특수 상대성 이론)
(4) 따라서, 현재론이 참이면 사건/대상의 존재 여부는 지시틀에 상대적이다
(5) 하지만, 사건/대상의 존재 여부는 관성 지시틀에 상대적이지 않다
(6) 따라서 현재론은 거짓이다
; 현재론에 따르면 현재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
; 그 사건이 현재적인지는 지금 시점과 동시적인가에 달려 있다
; 그런데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동시성 역시 상대적이다
; 한편 사건이나 대상의 존재 여부는 지시틀에 상대적이지 않은 것 같다
; 영희를 기준으로 하면 A 사건과 B 사건은 동시적이기에 둘 다 존재하거나 둘 다 존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철수를 기준으로 보면 A 사건과 B 사건은 동시적이지 않기에 둘 중 하나만 존재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의 여부는 지시틀에 관점 상대적인 사실이 아닌 것 같다
; 따라서 현재론은 거짓이다
; 특수 상대성 이론이 참이라면 현재론은 받아들일 수 없겠다

; 사실 이 논증은 현재성이 객관적인 성질에 해당한다는 다른 존재론인 과거현재론, 미래현재론 등에도 적용될 수 있다
; 이러한 충돌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영원론뿐인 것 같다

논리적 관점에서 (5)를 거부할 수 있는가?
; 사건이나 대상의 존재 여부는 지시틀에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 우리의 존재 개념에 입각하여 보면 거부할 수 없는 것 같지만, 그러한 입장도 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른 가능한 입장으로서 특수 상대성 이론을 거부할 수도 있다
; 어떤 과학이론이라 할지라도 그 과학이론은 이러저러한 방법론적 원리 혹은 명시적인 이론적 가정 하에서 이루어진다
; 특수 상대성 이론은 경험론적 방법론에 입각해 있다
; 즉 경험적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물리량만을 실재적인 양으로 상정하고 있다
; 그런데 그 방법론적 원리가 정말 일관적으로 적용된 것인지 물었을 때, 과학 이론에도 어떤 의미에서 철학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가정들이 상정되어 있을 수 있다
; 가령 앞선 영희와 철수 사례에서 철수가 B 사건이 먼저 발생했다고 관찰했지만 그로부터 B가 먼저 발생했다고 볼 수 없을지 모른다
; 철수에 상대적으로 B에서 발생한 빛의 속도가 빠른 것이고, 철수에 상대적으로 A에서 발생한 빛의 속도가 느린 것이라 이해할 수 있을 수도 있다
; A와 B에서 동시에 빛이 출발했지만 A에서 출발한 빛이 철수와 먼저 만난 것이고 이로부터 A와 B에서 빛이 동시에 출발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 물론 특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모든 관성 지시틀에서 빛의 속도는 항상 일정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반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모든 관성계에서 관찰되는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상대속도를 인정하지 않는 이 원리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 경험론적 원칙에 입각해 보면 빛 속도 불변의 원리가 반드시 참이라고 받아들일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 그에 상응하는 다른 원리에 입각해서 동시성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 시간 지연 등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대체 이론이 제안되기도 했다

; 현대 과학이 어떤 것을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순수히 사변적인 철학적인 고려만을 통해 논의를 진행할 수는 없다
; 만약 현대 과학과 형이상학적 이론이 충돌할 경우 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형이상학 이론을 무조건적으로 배제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 과학이론이 틀린 것일 수 있으며, 그 과학이론을 살펴보면 순전히 경험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만이 아닌 철학적 신조에 입각하여 가정된 것이 있을 수 있다(물론 그 가정된 것이 단지 철학적 원리들만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시간과 관련한 다양한 논의를 살펴봤다
; 앞으로 개체의 지속과 관련된 논의를 진행할 때, 논의의 편의를 위해 시간 관련된 존재론 중 현재론과 영원론만을 고려할 것이다
; 또한 현재론은 A 이론을 전제하고, 영원론은 B 이론을 전제한다고 하자
; ‘현재론/A이론/3차원주의/특수상대성이론과 충돌 vs 영원론/B이론/4차원주의/특수상대성이론 수용 가능’으로 나누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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