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개체의 본성: 다발이론과 기체이론

본 [형이상학] 항목은 교수님께 동의를 얻고 2021년 1학기 서울대학교 ‘형이상학’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내용 흐름은 수업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핸드아웃을 최대한 풀어 쓰려 노력했다. 본 글에는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며, 그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사전 문의 없이 무단으로 복제, 배포하는 행위는 금한다.


구체적 개별자, 개체의 본성은 무엇인가?

우리가 개체를 알게 되는 방식은 어떠한가? – 다발이론과 기체이론
; 순수 사유를 통해서 개체를 알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개체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개체를 알게 되는 것 같다
; 가령 우리는 지각 경험을 통해서 컵을 알게 된다
; 그렇다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 친구의 강아지 곰이에 대해 알게 될 때, 곰이 개체를 전체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파악하는가?
; 곰이를 통해 드러나는 속성들을 알게 되고 그 속성들을 통해 곰이를 알게 되는 것 같다
; 지각에 의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속성들이 있어서 그런 것들을 통해 개체에 대해 알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 즉 우리가 개체가 있다고 믿을 때 개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을 통해 혹은 속성들과 함께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 같다
; 개체에 대한 인식의 순서에 있어, 그 개체를 먼저 알고 그 개체의 속성을 안다기보다는 그 개체의 속성들이 우리의 인식에 먼저 주어지고 그 이후 그 속성들을 통해 개체를 알게 되는 것 같다
; 이러한 방식으로 인식 순서를 받아들여 본다면, 우리가 무언가 인식하는 순서를 생각했을 때 속성이 먼저고 그 후에 그 속성의 소유자로서의 개체를 알게 된다

; 몇 학자들은 그 인식적 순서가 존재론적 순서를 반영하고 있다고 믿는다
; 즉 경험을 통해 먼저 속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개체를 알게 되는 것은, 개체는 속성들의 다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개체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만나는 속성들을 통해 환원적으로 이해되는 그런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속성들과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개체는 이해하기 힘들다, 개체를 속성들 이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 본다면 신비스러운 존재자가 된다
; 따라서 개체는 속성들의 다발이거나 속성을 통해 환원적으로 이해되는 존재자이다 (개체에 대한 다발이론)

; 다발이론의 한 가지 연원은 흄적 경험론이다
; 경험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존재한다
; 경험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것은 감각을 통해 파악되는 경험적 속성들이고, 개체는 이러한 것들의 구성물로 이해될 수 있다
; 경험적 속성들의 다발 너머의 어떤 것은 사실 실체가 없는 것이다
; 그러나 한편 다발이론이 꼭 경험론적 견해라고 볼 수는 없다
; 라이프니츠의 합리론적 견해에서도 다발이론이 따라나올 수 있다
; 라이프니츠는 감각 경험적 속성만이 근본적인 속성이라고 보지 않는다
;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감각 경험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악되는 속성이건 합리적 직관에 의해 선험적으로 파악되는 속성이건, 개체를 속성들의 다발로 이해할 수 있다
; 라이프니츠도 개체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을 통해 환원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합리론적 전통에 입각한 것이든 경험론적 전통에 입각한 것이든 다발이론가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 다발이론이 거짓이라면 개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 너머에 있는 어떤 것, 속성들을 통해 환원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 어떤 한 개체가 바로 그 개체인 이유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 때문이 아니다, 근본적인 것이다(개체성)
; 어떤 개체의 개체성은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 우리는 속성을 잘 이해하고 있지만, 다발이론이 거짓이라면 개체는 우리가 잘 이해하고 있는 속성들을 통해서는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된다
;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상정하는 것은 허구적인 것으로서 거부해야 한다
; 즉 다발이론은 우리가 잘 이해하고 있는 속성을 통해 이해될 수 없는 그 무엇으로서의 개체성과 같은 것을 상정하지 않는 견해다

다발이론에 따르면,
; 개체는 구조적 존재자로, 속성들을 그리고 속성들만을 구성성분으로 가지는 속성들의 다발이다
; 개체는 속성을 통해 빠짐없이 환원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존재자다

다발이론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구별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줄여서 구동원리라 부르자)
; 개체 a와 b가 임의의 속성에 있어서 차이가 없으면, a가 속성 F를 가지고 있으면 b도 F를 가지고 있고 b가 속성 F를 가지고 있으면 a도 F를 가지고 있다면, a와 b는 동일한 개체이다
; 이는 한 개체와 다른 개체가 구별된다고 할 때 그 구별은 속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두 개체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속성에 있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구동원리는 속성에 있어 구별되지 않는 것들은 동일한 개체임을 함축한다

구동원리를 바꾸어 동구원리(동일한 것의 구별불가능 원리)를 생각해 보자
; a와 b가 동일한 개체라면 a와 b는 모든 속성에서 구별불가능하다
; 이는 구동원리보다 당연한 것 같다
; 동구원리는 다발이론을 수용하든 다발이론을 거부하든 받아들일 만한, 어떤 의미에서 사소한 주장이다

반면 구동원리는 다발이론을 거부하는 입장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 a와 b의 차이는 그것들이 가지는 속성들의 차이를 통해 나타나지 않는다
; 개체 a와 b가 속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더라도, a와 b가 가지는 원초적인 개체성을 통해 a와 b가 구별될 수 있다
; 따라서 다발이론은 구동원리를 함축하며, 구동원리를 거부하는 입장에서는 다발이론을 거부한다

개체가 속성들의 다발이라고 할 때 다발의 의미는 무엇인가?
; 개체의 세 속성 a, b, c
; 세 속성 a, b, c의 다발은 속성 a와도, 속성 b와도, 속성 c와도 동일하지 않다
; a, b, c의 다발은 하나이므로 a, b, c의 다발은 여럿으로서의 a, b, c와도 동일하지 않다
; 그렇다면 a, b, c의 다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a, b, c의 집합과 같은가?
; 그렇지 않은 것 같다
; 집합은 각 원소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자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즉 속성 a, b, c가 서로 멀리에서 각각 예화된다고 했을 때 그 속성들을 원소로 가지는 집합이 존재하지만 a, b, c 다발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a, b, c의 다발이라는 것은 세 속성이 통합성을 이루는 방식으로 함께 나타나고 있다
; ‘속성들의 통합성’, 즉 속성들이 함께 나타난다, 함께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함께 예화되어 있다 …
; 다발이론에 따르면 ‘함께 나타난다’는 것 등의 통합성은 더 이상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원초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발이론에 따라 개체를 속성들의 다발이라고 말할 때, 그 속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 단출한유명론과 집합유명론은 존재론적 측면에서 속성을 배제한다
; 다발이론가들에게 속성이 될 수 있는 것은 트롭유명론(속성은 트롭과 같은 추상적 개별자다) 혹은 보편자실재론(속성은 보편자다)이다
; 다발이론은 그 속성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 버전이 있다
; 앞으로 문제가 제기될 때 다발이론 일반에 적용되는 문제인지, 개체를 보편자 다발 혹은 트롭 다발로 보는 다발이론의 특정한 버전에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문제인지, 제기되는 문제의 성격을 잘 파악해 보자


기체이론
; 개체를 이해할 때 그 인식의 순서는 개체가 가지는 속성을 통해서 개체를 이해하는 것이고, 속성들은 개체를 이해하기 위한 필연적인 통로이지만, 개체 자체는 그런 속성들을 통해 환원적으로 이해되는 속성들의 구축물이 아니라 그 속성들의 너머에서 속성을 담지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다발이론에서는 속성들 사이에 스스로 성립하는 관계로 인해 나타나는 통합성을 설명했지만 기체이론에서는 그러한 통합성은 속성들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속성들을 통해서는 이해될 수 없는 그 무엇에 여러 속성들이 동시에 귀속됨으로써 통일성/단위성을 가지게 된다

속성들을 통해 이해될 수는 없지만 속성들을 떠받쳐주고 있는, 개체성을 담보해주는 어떤 종류의 존재자: 기체(substrate)
; 기체라는 표현은 대표적인 경험론자인 로크에 의해 사용되었다
; 로크는 경험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감각 경험에 의한 속성(관념)들뿐이라고 믿는다는 점에서는 흄과 유사하나, 그 너머에 기체라는 어떤 것이 있어 그것이 속성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 기체는 속성들을 통해 환원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 기체는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없는 그것이다(=모른다)
; 그럼에도 속성들의 담지자로서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 기체를 통해 개체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기체이론에 따르면 속성은 원리상 어떤 의미에서 공유될 수 있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 속성은 인식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객관적 유사성의 근거로서, 공유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 그런데 개체는 그러한 일반적인 성질들을 통해서는 이해될 수 없다
; 개체 a와 b가 속성에 있어 무척 유사하고 일반적인 속성을 충분히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 개체들이 가지는 개체성을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원초적인 개체성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기체는 속성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속성의 소유자이기는 하다,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자로 이해된다
; 기체는 그 자체로 무엇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 민개별자(bare particular)

기체이론에서 속성들과 별개로 이해할 수 있는 개별자가 있다고 말할 때 그 개별자에는 두 가지가 있다
; a, b, c라는 속성의 담지자로서의 기체(민개별자), 하나의 개별자이지만 그 자체는 속성이 없다
; 민개별자와 그것이 소유하고 있는 속성들까지 포함한 전체 존재자,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 개별자라 부를 수 있다
; 기체이론에서 일상적 개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실 두 종류의 개별자가 관여하고 있다 – 민개별자, 민개별자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 전체
; 전자는 얇은 개별자, 후자는 두터운 개별자이다(암스트롱)
; 두 개별자를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개별자는 둘 중 무엇인가, 우리가 이름을 사용해서 개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름이 지시하는 개별자는 둘 중 무엇일까)

기체이론가는 구동원리를 거부한다
; 정확히 동일한 속성을 공유한다 하더라도 서로 동일하지 않은 두 개체가 있을 수 있다
; 그 차이는 민개별자의 차이에 의해 설명된다
; 이처럼 구동원리의 수용여부에 따라 견해가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 구동원리 수용 – 다발이론 / 구동원리 거부 – 기체이론(이는 엄밀하지는 않은 답변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