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철학] 크립키-비트겐슈타인의 회의적 역설과 사적언어의 불가능성

본 [언어철학] 항목은 교수님께 동의를 얻고 2020년 1학기 서울대학교 ‘언어철학’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내용 흐름은 수업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핸드아웃을 최대한 풀어 쓰려 노력했다. 본 글에는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며, 그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사전 문의 없이 무단으로 복제, 배포하는 행위는 금한다.


1984년 크립키는 『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비트겐슈타인의 규칙과 사적언어)』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의 의미회의주의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제시한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크립키의 해석이 올바른지에 대한 문제와는 별개로, 이 해석은 “크립켄슈타인의 의미회의주의(크립키-비트겐슈타인의 의미회의주의)”라 불리며 강력한 논증으로 평가된다.

크립키-비트겐슈타인, 이하 크립켄슈타인의 회의적 역설
; “화자 S가 언어표현 e로 m을 의미한다” 형태의 의미 귀속 문장에 대해, 이러한 문장을 참이거나 거짓이게끔 만들어주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 어떠한 의미 귀속 문장도 진리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의미를 결정해줄 수 있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크립키는 덧셈기호 ‘+’의 예시를 들어 회의적 역설을 논변하는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 이제 막 덧셈을 배우고 있어 유한하게 많은 수의 덧셈만을 해 본 어린아이 철수를 떠올리자. 이때 철수가 57보다 작은 수에 대해서만 덧셈을 해 보았고, 철수에게 새로운 덧셈 문제 ’68+57’의 답을 묻는다.
; 철수는 “나는 언어표현 ‘+’로 더하기를 의미하고 있으므로 답은 ‘125’이다.”라고 대답한다.
; 그런데 의미회의주의자가 답은 ‘5’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사실 철수는 과거에 언어표현 ‘+’로 더하기가 아니라 겹하기를 의미하고 있었을 수 있다. 겹하기 함수란 x 겹하기 y에 대해 x, y가 모두 57보다 작을 경우 x 더하기 y 값을, x 또는 y가 57보다 크거나 같을 경우 5를 산출하는 함수이다.

이때 핵심이 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철수가 언어표현 ‘+’로 겹하기가 아니라 더하기를 의미하고 있었다는 것을 결정해 줄 수 있는 사실이 존재하는가? 회의주의자에 따르면 그러한 사실은 없다. 철수가 더하기를 의미하는지 겹하기를 의미하는지 구분해 주는 철수에 대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표현의 의미를 결정해 줄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사실 후보들을 살펴보자.

(1) 철수의 과거 덧셈 행위들의 총체
; 철수의 과거 덧셈 행위들은 더하기 함수와 겹하기 함수 모두에 일관적이다.

(2) 기호 ‘+’의 사용에 대한 일반적 규칙
; 철수는 ‘+’의 사용에 대한 일반적 규칙을 파악함으로써 ‘+’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가령, “질문 ‘x+y는?’에 대한 답은 숫자 ‘x’가 지시하는 수만큼의 조약돌 무더기와 숫자 ‘y’가 지시하는 수만큼의 조약돌 무더기의 합을 센 결과이다.”와 같은 규칙을 파악할 수 있다.
; 그러나 모든 규칙은 비표준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가령 제시된 규칙에 등장하는 언어표현 ‘세다’는 세다가 아니라 제다로 해석될 수 있다. 이때 제다란 무더기 z를 젤 때 z 가 단일한 무더기이거나 57개 미만인 무더기들로만 이루어져 있을 경우 z를 세고, z가 두 무더기 이상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하나가 57개 이상일 경우 5라고 답하는 것이다.
; 이처럼 ‘+’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규칙을 제공함으로써 언어표현의 의미를 결정하려 하면 결국 무한퇴행에 빠지며 의미는 결정될 수 없다.

(3) 심상 혹은 어떤 감각질을 가지는 정신적 상태
; 철수가 “이해했다!”와 같은 느낌을 가짐으로써 ‘+’를 더하기로 이해했는지 겹하기로 이해했는지 알 수 있다.
; 그러나 ‘+’로 더하기를 의미할 때 반드시 우리에게 어떤 심상이나 정신적 상태가 수반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 자체는 규칙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가령, ‘빨간색’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머리 속에 빨간색 이미지를 떠올리는 영희를 가정하자. 영희에게 빨간색 공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영희는 ‘머리 속에 떠오른 색과 보색인 색의 공을 가지고 오라’라는 규칙을 따르며 초록색 공을 가져온다. 이때 영희에 따르면 ‘빨간색’은 초록색을 의미한다.
; 이처럼 머리 속의 심상만으로는 그 심상에 따라 어떠한 행동을 할지 결정될 수 없다.

(4) 감각질로 환원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정신적 상태
; 이 답변은 어떤 신비한 존재자에 호소하고 있을 뿐 아무런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

(5) 성향
; 의미 귀속 문장 “철수는 ‘+’로 겹하기가 아니라 더하기를 의미한다”는 “철수가 각 덧셈 질문 “x+y=?”에 대해 x 겹하기 y 값이 아니라 x 더하기 y 값을 답변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로 설명될 수 있다. 철수는 과거의 유한한 사례들을 통해 덧셈 성향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답은 ‘125’인 것이다.
; 그러나 성향에 호소하는 답변도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 먼저 ‘+’의 의미는 무한한 덧셈 사례들의 답을 모두 결정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성향은 결국 유한한 것으로, 덧셈 성향은 무한한 사례들의 답을 모두 결정해 줄 수는 없다.
; 또한 ‘+’의 의미는 화자가 덧셈 사례에 대해 단지 어떤 답변을 줄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답변을 주어야 하는지 결정한다. 즉, 화자의 성향과 덧셈 행위 간의 관계는 서술적이지만 화자가 파악한 의미와 덧셈 행위 간의 관계는 규범적이다. 그러므로 성향에 호소하는 답변은 철수가 ‘+’의 의미를 겹하기로 파악한 경우와, 철수가 ‘+’의 의미를 더하기로 파악하고 있지만 덧셈 행위에 있어 어떤 체계적인 실수를 범하는 경우를 구분할 수 없다. 언어표현을 A와 같이 사용해야 하지만 그렇게 사용하지 않을 수 있듯, 실수란 규범적 상태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콰인은 행동주의적 전제를 통해 의미회의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크립키-비트겐슈타인은 이처럼 모든 가능한 범주의 사실들을 의미결정사실의 후보자로 고려한 후 이중 어느 것도 의미를 결정해 줄 수 없음을 보인다. 따라서 크립켄슈타인의 의미회의주의는 콰인의 의미 회의주의보다 훨씬 강력한 논증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크립켄슈타인의 의미회의주의는 콰인의 의미회의주의와 마찬가지로 존재론적 회의주의에 대한 주장이다. 즉 의미를 결정해 줄 수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을 넘어 의미를 결정해 줄 수 있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회의적 역설에 대한 성향주의 해결책 비판과 관련된 부분은 생략했다.
; 세련된 성향주의(sophisticated dispositionalism), 보고시안의 논증, 극도로 세련된 성향주의(ultra sophisticated dispositionalism), 램지-루이스 식 환원


회의적 역설에 따르면 의미는 없다. 의미 회의주의자의 주장이 옳다면 의미 회의주의자는 의미가 없다고 얘기할 수조차 없으므로, 이는 자기파괴적이다. 의미 회의주의의 파괴적 결론을 막으려면 비록 의미는 아니지만 의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의미와 비슷한 무엇인가가 제시되어야 한다. 이를 ‘회의적 해결책(skeptical solution)‘이라 한다.
; 의미를 결정해 줄 수 있는 사실은 없지만, 의미 귀속 문장이 어떤 조건 하에서 발화될 때 그것이 우리 삶에서 어떤 유용한 역할을 함으로써 정당하게 주장될 수 있다. 즉 의미 귀속 문장은 주장가능성 조건(assertibility condition)을 가진다.
; 철수가 표현 ‘+’로 더하기를 의미한다면 그리고 오직 그 경우 의미 귀속 문장 “철수는 ‘+’로 더하기를 의미한다”가 참이다. 그러나 그러한 참일 조건, 즉 진리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 대신 철수가 그가 속해 있는 언어공동체의 거의 모든 성원들이 표현 ‘+’를 사용하는 방식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를 사용한다면 그리고 오직 그 경우 의미 귀속 문장 “철수는 ‘+’로 더하기를 의미한다”는 주장가능하다. 이처럼 어떤 사람의 언어 사용 행동이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언어 공동체 성원들의 행동과 거의 일치하면 의미 귀속 문장이 주장가능하다.
; 그러나 물론 이때에도 공동체 전체가 집단적으로 ‘+’로 더하기가 아니라 켜하기를 의미하고 있을 수도 있다. 주장가능성 조건만으로는 이러한 경우를 배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여전히 철수의 ‘+’의 사용방식은 공동체의 ‘+’ 사용방식과는 일치하므로 의미 귀속 문장은 주장가능하다. 의미 귀속 문장이 참인 조건은 찾을 수 없더라도, 최소한 그러한 문장이 언제 적절하게 주장될 수 있는지는 찾을 수 있다.

주장가능성 조건
; 주장가능성 조건은 어떤 개인이 어떤 언어표현을 그 언어공동체 구성원들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 뭔가 중요한 조건을 함으로써 생긴다.
; 언어표현을 사용하는 행위 및 표현들의 사용과 연계된 모든 종류의 행위들을 ‘언어게임’이라 하면, 우리는 다른 공동체 성원과 비슷한 방식으로 언어 표현을 사용해야만 언어게임에 참여함으로써 그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공동체에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 물론 이때에도 공동체 성원들이 옳고, 혼자 언어표현을 다르게 사용하는 사람이 틀렸다는 것을 결정해 줄 수 있는 사실은 없다. 그럼에도 어쨌든 공동체는 언어표현을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고, 그러한 공동체의 사용방식에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공동체 성원들과 같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 다행히도 실제 공동체 성원들은 대부분 비슷한 언어 사용 방식을 보인다(‘삶의 형식’에서의 일치 by 비트겐슈타인)

이러한 회의적 해결책에 따르면 어떤 언어표현을 적절하게 사용하는지의 여부는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공동체 성원들이 그 언어표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어떠한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어떤 개인이 유일하게 사용하는 개인언어인 사적언어는 불가능하다(사적언어의 불가능성). 이때 사적언어(private language)란 그 개인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언어이다.
; 개별 화자 S와 관련된 사실들 중 어떠한 것도 의미 귀속 문장 ‘S는 표현 e로 m을 의미한다’를 참으로 만들어주지 못할 뿐 아니라, 이 문장을 주장가능하게 해주지도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개별 화자를 넘어서서 다수의 언어 사용자들로 이루어진 언어공동체를 생각해 보면, 비록 의미 귀속 문장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사실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지만 이 문장을 주장할 수 있게 해주는 사실은 존재하는 것이다.
; 따라서 언어가 가능하려면 해당 언어를 사용하려는 언어 공동체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고, 사적언어를 사용하는 언어 공동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사적언어는 불가능하다.
; 크립키 이전의 학자들은 “사적언어가 왜 불가능한가?”를 물었다면 크립키는 “언어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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