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철학] 콰인의 의미회의주의

본 [언어철학] 항목은 교수님께 동의를 얻고 2020년 1학기 서울대학교 ‘언어철학’ 강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내용 흐름은 수업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핸드아웃을 최대한 풀어 쓰려 노력했다. 본 글에는 틀린 내용이 있을 수 있음을 밝히며, 그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 사전 문의 없이 무단으로 복제, 배포하는 행위는 금한다.


콰인은 원초적 번역의 상황을 상정하여 번역 불확정성 논제를 펼치고, 이로부터 의미회의주의를 이끌어낸다.

원초적 번역의 상황
; 언어학자가 이제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어느 부족의 언어를 번역하려는 상황
; 이때 언어학자가 번역편람(번역 대상 언어의 각 문장을 번역언어의 각 문장과 일대일 대응시킨 리스트를 제공해줄 수 있는 편람)의 올바름에 대한 증거로 채택할 수 있는 것은 그 부족 원주민의 행동과 관련된 사실들뿐이다
; 콰인은 행동주의적 전제를 취한다. 즉, 의미에 대한 사실이 있다면 이 사실들은 오직 화자의 행동과 관련된 사실들만으로부터 결정되어야 한다. 의미의 공공성을 고려하였을 때, 의미를 결정해줄 수 있는 사실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적으로 인식가능한 사실들(상호주관적으로 이용가능한 단서들, intersubjectively available cues)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콰인의 의미하는 행동(behavior)은 행위(action)와 구별된다. 행동은 인간 신체에서 일어나는 공적으로 관찰가능한 물리적 사건이며, 의미론적, 심리적, 지향적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기술될 수 있어야 한다.
ex. 철수가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철수는 자신의 휴대전화 자판에서 번호 010-1234-5678을 눌렀다.

행동주의적 관점에서 의미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해 볼 만한 개념인 ‘자극 의미(stimulus meaning)’가 있다.
; 문장 S의 자극의미 = 그 자극 하에서 “S?”라고 물었을 때 동의를 촉구시키는(ASM) + 반대를 촉구시키는(NSM) 자극의 순서쌍

사실 많은 경우 문장의 자극의미는 문장의 직관적 의미와 매우 다르다. 가령, 문장 “모든 사람은 죽는다”의 자극의미에는 모든 자극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게 분석문장인 것은 아니다. 콰인이 제시한 자극의미의 정의에 따르면 한국어 공동체에서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 선수이다”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같은 자극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만, 관찰문장의 경우에는 문장의 자극의미와 직관적 뜻에서의 의미가 동일한 것 같다. 관찰문장에 대해서는 답변자가 어떤 적절한 감각자극 유형의 사례들을 겪을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그 관찰문장에 대해 동의하기 때문이다. 가령, “이것은 빨갛다.” “이것은 네모 모양이다.” “이것은 짜다.” 등이 관찰문장이다. 한편 “이것은 아이폰이다.”에 반대하거나 동의하기 위해서는 답변자가 아이폰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부가적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하므로 이는 관찰문장이 아니다.

*문장의 자극의미를 그 문장을 발화하는 행동을 산출하는 자극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극의미를 이처럼 정의하면 많은 문장들에 대해 그 문장의 자극의미가 없어진다. 가령, “서울은 한국의 수도다.”, “2는 짝수다.”에 대해 해당 문장을 발화하는 행동을 산출하는 자극을 생각하기 어렵다.


원초적 번역의 상황을 살펴보자.
원초적 번역자가 원주민 언어에서 동의와 반대를 나타내는 표현을 찾아낼 수 있다고 가정하자. 이것들을 통해 원초적 번역자는 임의의 원주민 언어 관찰문장 S에 대해 S의 자극의미를 파악하여 이 문장들의 의미를 잠정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이어서 여러 관찰 문장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개별 표현들 각각을 그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자신의 언어 표현들과 일대일 대응시키는 ‘분석적 가설들’을 채택하고, 번역편람을 만들어낸다.

콰인은 원초적 번역의 상황에 대한 ‘Gavagai’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 가상의 문장 ‘Gavagai’를 도입하자.
; 원주민이 자신의 근처에 토끼가 있을 때마다 ‘Gavagai!’라는 경우문장에 동의하고, 토끼가 없으면 ‘Gavagai!’에 반대한다고 가정하자. 이때 원초적 번역자는 원주민 언어의 문장 ‘Gavagai!’와 우리말 문장 ‘토끼이다!’가 같은 자극의미를 가진다고 파악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 원주민 언어의 문장 ‘Gavagai!’에 대해 ‘토끼이다!’라는 번역을 선택하는 대신 ‘4차원 토끼 시공간체의 시간단면이다!’라는 번역을 선택하면 어떤가?
; 우리는 공간 속의 토끼를 하나의 연속된 실체로 파악하지만, 시간 관점에서는 각 시점의 토끼를 따로따로 본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시간적 관점에서 특정 시점의 토끼를 토끼 전체로 보지 않고, 토끼의 시간적 연속체를 생각할 수 있다. 그들에 따르면 지금 보고 있는 토끼는 시간적 연속체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가령, 태어날 때부터 상대성이론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공간과 시간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아 어떤 대상을 시공간적으로 늘 볼 수 있을지 모른다.)
; 첫 번째 번역을 택하든 두 번째 번역을 택하든 두 번역에 대응되는 자극의미는 정확히 동일하다. 토끼가 있을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4차원 토끼 시공간체의 시간 단면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올바름을 결정짓는 유일한 가능한 증거는 자극의미뿐이므로 원주민 언어의 문장 ‘Gavagai’는 어떻게도 번역될 수 있다. 둘 중 어떤 문장이 올바른 번역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사실은 없다.
; 같은 논리로, ‘Gavagai!’를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한 부분이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어떤 사람들은 공간에 대해서도 하나하나의 부분들을 실체로 볼 수도 있다).
; 같은 논리로, ‘Gavagai!’를 ‘토끼임의 육화이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가령, 날 때부터 플라톤주의자인 사람은 토끼 이데아가 육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이 모든 문장은 자극의미가 정확하게 동일하다. 이중 어떤 번역을 선택할 것인가는 순전히 실용주의적 고려에 의해 결정되며, 어떤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반론
; ‘Gavagai!’ 이외에 원주민 언어의 다른 표현들까지 고려한다면, 자극의미에만 근거해서도 어느 번역이 옳은지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 가령 번역 ‘토끼이다!’와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한 부분이다!’ 중 어떤 것이 옳은 번역인지 결정할 때, 원주민 근처에 있는 토끼의 꼬리와 코를 각각 가리키면서 “Si siht gavagai emas sa taht gavagai?(이 gavagai가 저 gavagai와 같은가?)”라고 질문한다. 만일 원주민이 동의한다면 ‘gavagai’는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한 부분’으로 번역될 수 없다.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한 부분인 토끼의 꼬리와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한 부분인 토끼의 귀는, 해당 토끼의 서로 다른 분리되지 않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콰인의 재반론
; 위 반론은 원주민 언어 표현 ’emas’를 ‘동일한’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emas’를 ‘동일한 것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으로 번역한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gavagai’를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한 부분’으로 번역했을 때, 같은 질문은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이 부분은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저 부분과 동일한 것의 분리되지 않은 부분인가?”로 번역된다. 이때 원주민이 동의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gavagai’를 ‘토끼의 분리되지 않은 한 부분’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콰인의 시나리오로부터 번역 불확정성 논제가 따라나온다.

번역 불확정성 논제

  1. 어떤 언어 L1을 언어 L2로 번역할 때, 어떤 번역 편람이 올바른지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어떤 언어 L1을 언어 L2로 번역할 때, 번역과 관련된 모든 가능한 증거들과 들어맞으면서도 서로 양립불가능한 무한한 많은 수의 번역편람들이 원리적으로 존재한다. 즉, 행동과 관련된 모든 가능한 사실들의 총체는 서로 양립불가능한 두 번역편람을 채택하는 것과 일관적이다.

번역 불확정성 논제의 존재론적 성격
; 콰인의 주장은 단순히 양립불가능한 번역편람들 중 어느 것이 올바른지 알 수 없다는 인식론적 주장이 아니다. 양립불가능한 번역편람들 중 어느 것이 올바른지를 결정해주는 사실 자체가 없다는 존재론적 주장이다(의미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주의).
; 행동과 관련된 모든 가능한 사실들은 주어진 번역편람이 올바른지 “결정”하는 데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콰인이 일상적으로 ‘의미’라는 표현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콰인의 주장은 과학적, 이론적 관점에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할 때 의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촘스키는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 논제가 이론 미결정성의 한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비판한다.
; 물리 이론이 모든 가능한 관찰 증거에 의해서도 미결정적일 수 있다(이론 미결정성). 그러나 이는 해당 이론이 제기하는 존재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급진적 결론을 끌어내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처럼 두 번역 편람이 모든 가능한 관찰 증거에 의해서도 미결정적이라 해서 어떤 번역 편람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객관적 사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콰인은 번역 편람이 단순히 가능한 모든 관찰 증거들에 의해서만 미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물리적 사실들에 의해서도 미결정적이라 재반론한다. 따라서 번역불확정성은 물리이론의 미결정성에 덧붙여서 새롭게 추가된 미결정성을 가진다.
; 콰인에 따르면 이 세계의 모든 물리적 사실을 고정하더라도 의미 사실은 고정되지 않는다. 즉, 우리 세계가 물리적으로 어떤 세계인지 완전히 고정되어 있더라도 의미 사실은 고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미는 존재론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콰인의 재반론에 대해 비판이 가해진다. 콰인은 행동주의적 전제 하에서 번역불확정성 논변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전제에 따르면 세계의 모든 물리적 사실을 고정한다 하더라도 그중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행동과 관련된 사실들뿐이다. 즉, 행동주의적 전제의 옳고 그름이 중요해진다. 행동주의 심리학과 행동주의 언어학의 틀을 채택하지 않는 이들은 콰인의 논변을 설득력 있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실제로 오늘날 심리학과 언어학에서는 일반적으로 행동주의적 이론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행동주의에는 다양한 문제가 제기된다. 대표적으로 촘스키의 보편문법 가설에 따르면 인류에게는 언어에 대한 선천적 지식이 있을 수 있고, 그 지식은 의미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행동주의가 몰락하고 인지주의가 심리학과 언어학에서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음에 따라 콰인의 의미회의주의는 쇠퇴하였다.
그러나 크립키가 크립키-비트겐슈타인의 ‘회의적 역설’을 통해 행동주의적 전제를 가정하지 않고도 의미가 존재하지 않음을 논증하였고, 의미회의주의가 부활하였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