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이 살면서 가장 책을 많이 읽던 시절이던 것 같은데, 그때는 읽기 쉽게 쓰인 대중서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고전’에 워낙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읽을 때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더라도 참고 다 읽어내면 뭔가 성장한 듯한 기분이 드는 게 즐거웠고, 그 기분에 취해 현대 대중서나 해설서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해설서 대신 고전을 읽으면 그 분야에 대해 좀 더 원론적으로 다가간다는 즐거움도 느꼈다.
대학에 와서는 잘 알지 못하는 모든 분야를 고전으로 읽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고전을 읽을 만큼 내가 그 맥락을 아는 분야는 거의 없었고, 여러 분야를 접하기 위해서는 대중서가 첫 열쇠가 되어 주어야 했다. 수업에서 한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하게 되면서 분야를 세부적으로 나누게 된 것도 한몫을 했다. 가령 예전에는 ‘나는 철학은 좀 배경지식이 있으니까!’하고 무작정 칸트를 읽어 볼 생각을 했다면 요즘에는 ‘나는 서양고대철학이나 조금 알지, 중세나 근대는 모르니까 칸트는 중세와 근대 일반을 좀 알고 난 후 읽어 봐야겠구나’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해서도 역시 예전이었다면 ‘과학철학을 좀 알고, 과학기술학도 어느 정도는 아니까’하고 함부로 포스트휴머니즘의 고전 읽기를 시도했을지도 모르겠다. <포스트휴먼 오디세이>를 먼저 읽은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책을 읽으며 수업 시간에 포스트휴머니즘이 자주 언급되었지만 나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휴머니즘 – 트랜스휴머니즘 – 포스트휴머니즘’의 큰 줄기뿐 아니라 인공지능이나 사이버네틱스 등에 대한 장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았기에, 잊기 전에 서둘러 생각한 것들을 기록해 두고자 한다.
휴머니즘, 트랜스휴머니즘, 포스트휴머니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책의 가장 큰 주제는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선행되어 나타난 ‘휴머니즘(humanism)’과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을 살펴봐야 한다.
Humanism
르네상스 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휴머니즘은 신이나 종교만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베이컨과 데카르트를 거치며 지식을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이 강조되었고, 뉴턴의 물리학은 인간이 이성으로써 우주의 진리를 발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p. 10-11)
휴머니즘은 세 용어 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용어이며 르네상스, 인본주의, 인간성 회복 등을 키워드로 가지고 있다. 휴머니즘은 근대과학의 합리적 정신과 결부되며 인간의 이성에 대한 강조를 이어 나간다.
Transhumanism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인식되고, 인간 이성이 가진 힘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면서 몇몇 사상가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상황을 꿈꾸었다. (p. 11)
트랜스휴먼이란, 글자 그대로 지금의 인간을 초월한 인간을 말한다. 즉, 자연적인 진화나 기술적/의학적 방법을 통해 지금의 인간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갖게 된 인간으로, 트랜스휴머니즘은 이런 트랜스휴먼의 조건을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한 운동이나 이를 지향하는 이념을 의미한다. (p.20)
다윈의 후계자들 중 일부는 인간의 육체가 미래의 변화된 환경에 맞게 진화해서 지금과는 다른 육체를 갖는 것을 상상했다. 또 그들 중 일부는 인간이 신에 근접하는 지성을 이용해 아예 지금의 육체를 변형해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새로운 육체를 선사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점진적인 진화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는데, 과학기술을 적용해서 인간이 인간을 초월하는 트랜스휴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과거의 인간이 원숭이와 같은 조상을 공유한 존재였다면, 미래의 인간은 인간의 비천한 육체를 초월한 존재, 훨씬 더 멋진 존재,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형태와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등장했다. (p. 32)
웰스는 진화론이라는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미래의 인간의 모습이 지금과는 필연적으로 달라진다고 확신했다. 이런 상상은 웰스의 뒤를 이은 차세대 SF에서 펼쳐졌다. (p. 39) <마지막 그리고 첫 번째 인류>(1930), <멋진 신세계>(1932) 등이 그것들이다.
사이보그를 처음 명명한 사람은 클라인스와 클라인이다. 우주인의 정신 건강에 대해 연구하던 클라인은 클라인스를 불러들였고, 두 사람은 인간이라는 약한 생물종이 우주라는 낯선 환경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기계의 자동화 등의 방안을 떠올리던 둘은 발상을 전환해 몸 밖에 있는 기계에 건강을 의존하는 대신 기계를 몸 속에 넣어 몸의 일부로 만들자는 생각을 했다. 1960년 이렇게 생명체와 기계가 결합한 존재를 사이버네틱 오가니즘, 즉 ‘사이보그’라고 명명했다. (p. 64-65) 연구에 필요한 대부분의 기술이 당시로서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이 난 사이보그는 SF의 영역으로 밀려났다. (p. 69) <600만불의 사나이>로 방송된 드라마의 원작인 <사이보그>(1972), <소머즈>, <로보캅>, <스타 워즈>, <스타 트렉>, <공각기동대> 등이 그것들이다. 이처럼 사이보그는 과학 연구 프로그램이 아니라 대중문화 속에서 번식했고, 이를 통해 트랜스휴먼 상상력의 일부가 되었다. (p. 73)
이처럼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초월에 대해 이야기한다. 초기의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이 인간의 육체를 초월하는 미래를 생각했으며, 지금의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정신마저도 극복하고 초월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사이보그나 인공지능 등이 발전하여 현재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추월하는 세상을 꿈꾼다. 휴머니즘이 그 자체로 트랜스휴머니즘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정복적인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을 초월한 인간’을 지향하는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이어졌다.
19세기, 휴머니즘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니체는 이성만이 고도로 발달한 인간을 나약한 인간으로 비판한다. 그것이 지니는 힘으로 인해 추앙받던 이성은 처음으로 비판받았다. 이어서 카를 마르크스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라는 휴머니즘의 핵심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나 탐욕 등을 정당화하고 있다며 새로운 인간성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 존재자인 인간을 현존재라고 부르며 인간이라는 현존재가 본래 맺고 있는 관계를 모두 끊지 않는 한 이성을 통한 진리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처럼 세 학자는 이성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거두었으며 인간과 세상이 어떠한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탐구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이 ‘인간이 세상과 맺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하려 노력한다.
Posthumanism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기술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인간과 동물, 인간과 환경,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이 서로를 형성하고 서로 의존하는 관계임을 강조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에게만 의식와 인식이 있다는 휴머니즘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체에 인지 과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기계와 인간이 결합하여 사이보그를 만들 것이라는 전망이나, 인공지능이 독자적인 의식을 획득해 인간을 위협할 것이라는 전망에 유보적이거나 회의적이다. 대신 인간과 기계의 연결이 둘 모두에 새로운 가능성과 역량을 부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p. 14)
20세기 초반 논리경험주의와 반증주의, 20세기 중반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한 과학에 대한 성찰은 이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과 이에 바탕을 둔 인간중심주의에 큰 균열을 만들었다. (논리경험주의, 반증주의, 패러다임 이론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기에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다.) (p. 181)
19세기 중엽 처음으로 ‘기술에 대한 철학’이 생겨났다. 에른스트 캅은 모든 기술이 인간 몸의 ‘연장’이라고 주장했지만 1. 자연의 모방에 가까운 기술에 있다. 2. 그러한 견해는 도구와 기계의 차이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와 같은 두 측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마르크스와 하이데거는 도구와 기계를 구별하며, 도구는 사용자에게 긍정적인 반면 기술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하게 만들고(마르크스) 세상의 풍성함을 앗아간다고 보았다(하이데거). 특히 하이데거는 기술은 인간에게 자연과 동물, 사회와 인간 모두를 인간을 위한 재원으로만 다루도록 강요한다고 하였다. 질베르 시몽동은 마르크스나 하이데거와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그는 도구는 장인에 특화되어 인간이 사용하기 힘든 것에 비해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에, 모든 기술은 새로운 관계와 가능성을 만들어내며 그것이 기술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p. 184-192)
브뤼노 라투르는 과학과 기술을 결합한 사고를 하여 과학기술자의 실험실을 기술을 비롯한 비인간들을 투박한 재료에서 인간에게 유의미한 존재로 탈바꿈하는 곳으로 보았다. 이러한 과학과 기술의 결합을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라 불렀으며, 이는 인간-과학-기술-비인간의 얽힘이다. … 라투르의 기술철학은 기술의 주인으로서 인간의 지위에 질문을 던진다. 라투르에 따르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독자적으로 행위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술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지 기술의 주인도, 기술에 의해 지배당하는 노예도 아니다. (p. 193-194, p. 198)
인공지능에 대한 낙관론이 넘쳐나는 지금 와이젠바움의 주장은 우리 시대에 절실한 ‘느린 과학(slow science)’의 가치를 제공한다. 느린 과학이란 과학기술의 발전이 낳는 여러 가지 사회적 결과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과학의 발전 속도와 방향을 시민사회가 참여해서 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기술을 엔지니어의 전유물로 보고 기술을 통제하기만 하려는 입장을 극복하고, 기술과 인간이 공존하는 사회를 꿈꾸는 탈인간중심주의적 기술철학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2)에서 이어 하겠다.) (p. 217)
인간이 다른 종의 권리를 존중하고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포스트휴머니즘의 큰 줄기는 동물철학과 연결된다. 동물은 기계가 아니라는 새로운 감수성인데,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는 다른 존재였다. 따라서 동물은 기계에 불과한 존재였고 개를 산 채로 해부하는 것 등은 비판받을 일이 아니었다. 19세기 중엽 진화론이 나오면서 인간-동물의 연속성이 강조되었다. 다윈은 동물도 인간이 지닌 이른바 ‘인간성’의 여러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했고, 1964년 해리슨의 <동물 기계>는 공장식 축산을 비판했다. 이어서 ‘동물 권리’와 ‘동물해방운동’이 주장되었다. 동물에 대한 이런 새로운 태도는 비인간과 공존하는 세계관과 결합하게 되었다. (p. 220-235)
제임스 러브록은 지구의 생물권이 물리/화학적인 환경과 상호작용을 해서 환경을 생명체가 살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바꾸어왔다고 주장하며, 이런 살아 있는 존재인 지구를 ‘가이아’라고 불렀다. 초기 가이아 가설은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지 못해 과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채 신학자들, 신비주의 신봉자들, 환경오염을 정당화하려던 기업가들에게만 받아들여졌다. 사실 지구가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다는 가설은 과학혁명 시기 전만 하더라도 보편적이었다. 사람들은 ‘어머니 지구’를 믿었다. 그러나 과학혁명 이후 지구의 자원을 개발하고 채취하는 데에 어머니 지구의 이미지는 방해만 될 뿐이었고, 따라서 필요에 의해 지구가 죽었다고 보는 관점이 확립되었다. 자연 속 의지를 가진 유일한 행위자는 인간이었고, 인간이 어떻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가이아 가설은 그러한 고민을 다시 가능하게끔 했다. 플랑크톤이라는 증거를 찾은 가이아 가설의 지지자들은 ‘지구 시스템 과학’이라는 새로운 전문 용어를 만들어 ‘지구 시스템이 물리, 화학, 생물학적 구성 요소와 인간으로 구성된 단일하고 자기 조절적인 시스템처럼 행동한다’라 주장했다. 가이아 가설을 통해 연결망, 공생, 협력의 가치가 대두되었으며 우리는 조화와 상생에 대해 성찰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태도는 포스트휴머니즘의 태도와 연결된다. (p. 237-253)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에서 시작되어 인간이 세상과 맺고 있던 일방적인 관계를 지적하고 인간과 모든 비인간 사이의 연결을 강조한다. 연결의 문제는 생물학, 철학, 지구과학 등 다양한 학문들 내에서 고민되어 왔으며 고민들은 연결되어 오늘날 포스트휴머니즘의 새로운 감수성으로 조류를 함께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서로 다른 지적, 실천적 전통이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 가는 거대한 지적 모험의 과정인 ‘오디세이’를 들려준다.
* 인공지능과 사이버네틱스의 주제는 더 정리해 둘 만한 내용이 많은 듯해, 포스트휴먼 오디세이, 홍성욱 – (2)에서 이어서 별도로 다루겠다.